두다멜이 빚어낸 현대음악…흙, 공기, 불, 물이 휘몰아쳤다
지난해 9월 11일 구스타보 두다멜(사진)은 ‘음악·예술감독 지명자’ 자격으로 미국 뉴욕 필하모닉의 2025~2026 시즌 개막 무대에 섰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함께한 그 밤이 새 시대의 서막이었다면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링컨센터 데이비드게펜홀에서 이어진 이번 프로그램은 그가 음악·예술감독 지명자 신분으로 지휘하는 사실상 마지막 정규 프로그램이었다.

미국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현대곡을 만나는 일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위촉 예산, 재단과 기금의 지원, 여러 연주 단체가 재정 부담을 나누는 공동 위촉 방식까지 더해지며 현대음악을 둘러싼 생태계는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 두다멜은 전반부 전체를 현대음악 한 곡으로 채웠다. 2019년 오페라 ‘prism’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작곡가 엘런 리드의 신작 ‘두 대양 사이의 땅(Earth Between Oceans)’은 뉴욕 필하모닉과 LA 필하모닉의 공동 위촉작이다. 지난해 9월 LA 필의 시즌 개막 무대에서 두다멜 지휘로 세계 초연된 이 작품은 LA와 뉴욕 등 두 도시에서 영감을 받아 흙, 공기, 불, 물 네 악장으로 구성된다.
구스타보 두다멜이 미국 뉴욕 링컨센터 데이비드게펜홀에서 음악·예술감독 지명자 신분으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지휘하고 있다.  /크리스 리·뉴욕 필하모닉 제공
구스타보 두다멜이 미국 뉴욕 링컨센터 데이비드게펜홀에서 음악·예술감독 지명자 신분으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지휘하고 있다. /크리스 리·뉴욕 필하모닉 제공
이 작품은 지나치게 전위적이거나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는 음악이라기보다 조성 감각을 유지한 채 다양한 풍경을 펼쳐 보이는 쪽에 가까웠다. 60여 명 규모 뉴욕 필하모닉 합창단은 가사 없이 목소리만으로 오케스트라 질감 속에 녹아들어 갔다. 전체적으로는 오케스트라가 분위기를 끌고 나갔지만 군데군데 합창이 전면으로 떠오르며 끓어오르는 순간이 인상적이었다. 30분 넘는 길이에 합창까지 등장하는 곡인 만큼 호흡 배분과 서사 흐름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두다멜은 정확한 비트를 통해 과도한 개입 없이 음악 흐름에 길을 터주는 방식을 택했다.

‘불(Fire)’ 악장은 2025년 1월 LA를 덮친 산불의 기억을 배경으로 쓰였다. 리드는 그 시기에 이 악장을 작곡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물(Water)’ 악장 마지막에서는 현악과 금관, 합창이 한데 어우러져 파도처럼 넘실거리다 절정에서 폭발했다. 인터미션 동안 무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20명 규모의 현악 앙상블만 무대 중앙에 자리했다. 바이올린 없이 비올라 8명, 첼로 8명, 더블베이스 4명, 그리고 남성 합창. 편성부터가 독특했다. 두다멜은 이때부터 악보 없이 포디움에 올랐다.

슈베르트의 ‘물 위 영혼의 노래(Gesang der Geister über den Wassern)’는 1821년 2월 괴테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초연 당시에는 혹평받았지만 그럼에도 슈베르트는 이 텍스트와 형식에 끝까지 집착했다. “인간의 영혼은 물을 닮았다”는 괴테의 문장은 남성 합창의 어두운 울림과 낮은 현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앞선 리드의 물 악장이 열어놓은 세계가 슈베르트의 언어로 조용히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음은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길게 머물렀다.

음반에는 담기지 않는 것이 있다. 소편성 슈베르트에서 대편성으로 무대를 복원하는 동안 스태프 여덟 명이 의자와 보면대 수십 개를 분주하게 옮겼다. 보면대가 움직이면 악보도 움직인다. 그 긴장을 고스란히 떠안은 이는 악보 담당 스태프였다. 바그너 조력자인 헤르만 춤페가 편곡한 ‘숲의 속삭임(Waldweben)’은 지크프리트 2막, 영웅이 숲속에서 용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장면의 음악이다. 극적 상황과 달리 음악 자체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이다. 명쾌한 종결부에서 객석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 공연을 마쳐도 괜찮겠다 싶을 만큼 에너지가 느껴졌다.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3대 발레곡 가운데 가장 먼저 완성된 ‘불새’는 제일 접근하기 쉬우면서도 폭발적인 종결로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작품이다. 그는 이후 이 음악을 여러 차례 연주회용 모음곡으로 손질했고 이날 연주된 것은 1919년판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음악이 과도한 해석보다는 악보의 정밀한 실행 속에서 살아나야 한다고 믿었다. 불새의 화려한 외관 뒤에는 장면과 장면 사이의 전환, 오케스트레이션의 미세한 컬러, 연극적 흐름을 동시에 붙잡아야 하는 압박이 도사리고 있다.

두다멜은 이 25분짜리 모음곡을 마치 긴 앙코르처럼 여유 있게 풀어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지옥 춤(Infernal Dance)’에서는 짧고 날카롭게 각을 세우기보다 마치 소리를 짜내는 듯한 색다른 임팩트가 느껴졌다. 피날레에서 호른의 조용한 선율이 장엄한 마무리로 향하는 과정은 이날 공연 전체를 압축해놓은 듯했다.

두다멜은 커튼콜을 할 때 주변 여러 단원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들은 모두 밝게 웃고 있었다. 악단이 왜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지 그곳에 모인 관중도 함께 확인했다. 뉴욕 필하모닉은 단순히 오래된 악단이 아니다. 구스타프 말러가 부임해 악단 수준을 끌어올렸고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레너드 번스타인을 거치며 위상을 굳혔다. 쿠르트 마주어와 로린 마젤이 그 유산을 이어받았다. 오는 9월 전설들이 지나간 자리에 두다멜이 선다.

뉴욕=김동민 뉴욕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