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충격적이어서 숨겨야 했던 누드

1866년,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조용한 방에서 그림 한 점을 칼릴 셰리프 파샤(Khalil Sherif Pasha, 1831~1879)에게 공개했습니다. 당시 파리에 주재하는 오스만 제국 외교관이었던 파샤는 사치스러운 삶과 더불어 예술에 대한 조예, 특히 누드화 수집에 대한 취향으로 세간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앵그르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작품을 포함한 방대한 규모의 그림 컬렉션을 모아두고 있었고, 더 특이하고 대담한 것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칼릴 셰리프 파샤, 1860년경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그림을 의뢰하러 쿠르베를 찾아간다.
칼릴 셰리프 파샤, 1860년경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그림을 의뢰하러 쿠르베를 찾아간다.
쿠르베는 그러한 그의 욕망을 만족시켜줄 작품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파샤에게 보여준 그림은 겨우 46cm x 55cm에 불과한 아담한 크기였습니다. 향후 미래에 미칠 파급력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작은 크기였죠. 그림 속 구겨진 시트 위에 그려진 여성의 하반신은 다리가 벌어져 있었고, 음모가 보였으며, 섬세한 살덩이 사이에 성기가 버젓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쿠르베는 살아생전 이 작품에 공식적인 제목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훗날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이 그림은 <세상의 기원>이라고 알려지게 됩니다.
130년간 숨겨야 했던 파격의 노골적 누드, 세상의 기원이 되다

스스로 직접 목격한 것만 그린 예술계의 반항아: 귀스타브 쿠르베

쿠르베는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프랑스 오르낭 시골의 반골 기질이 다분한 부유한 농부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신념을 붓질로 표현한 혁명가’나 다름없었습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단은 귀족들의 텃세와 더불어 특정한 기준을 만족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육체만을 그려야 한다는 아카데미의 규범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쿠르베는 이 질서에 거침없이 맞섰고, 그 과정에서 어느새 파리의 유명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해마다 공식적으로 후원했던 미술 전람회인 ‘살롱(Le Salon)’이 우화와 신화를 주제로 한 교훈적인 그림이나 화가의 기술적인 면모를 뽐내는 화려한 작품만을 선호하고 찬양하는 동안, 쿠르베는 일상 속의 벌거벗은 진실을 찾고자 농민과 노동자들의 일터로 갑니다.

스스로의 화풍을 '사실주의(Realism)'라고 불렀지만, 사실주의의 ‘사실’은 사진처럼 정확하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쿠르베의 ‘사실’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 물리적인 현실, 즉 본인이 직접 보고, 만지고, 냄새 맡은 것을 최대한 미화 없이 포착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쿠르베에게 사실주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보여주는 매우 유명한 발언입니다. 쿠르베가 현장에서 본 것은 고된 노동으로 나이 들고 주름진 일꾼들의 연약한 몸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모습을 꾸밈없이 담담하게 그려내기로 합니다. 자신이 본 현실을 차분하게 화폭에 담아낸 쿠르베의 예술 철학에 감동했던 것일까요? 고상한 것만을 추구하던 살롱 심사위원단은 점차 다양한 작품을 심사하고자 작품 제출 기준을 완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1849년, 파리의 튀일리 궁전에서 개최된 살롱에서 쿠르베는 고향 오르낭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로 금메달을 받게 됩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 1849년. 이 작품은 쿠르베에게 어마어마한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정작 그림의 주제는 지극히 평범했다. / 그림 출처. 릴 보자르 미술관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 1849년. 이 작품은 쿠르베에게 어마어마한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정작 그림의 주제는 지극히 평범했다. / 그림 출처. 릴 보자르 미술관
동료 화가들이 성경의 구절이나 그리스 신화를 캔버스에 그려내는 사이, 쿠르베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습니다. 살롱에 등단 후, 이어지는 2년 동안 서민들의 삶을 담은 거대한 캔버스를 살롱에 출품했고,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돌 깨는 사람들>은 길가에서 말없이 바위를 쪼개는 두 노동자의 모습을 거대한 화폭에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동안 이런 크기의 그림은 관례상 오직 신화 속 잘 알려진 영웅들에게만 허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돌 깨는 사람들>은 그러한 전통을 무시하고 땀, 흙, 그리고 피로에 젖은 무명의 두 노동자에게 이 넓은 공간을 양보합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1849년. 고된 노동의 현장을 대형 화폭에 담은 획기적인 명화. 안타깝게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귀스타브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1849년. 고된 노동의 현장을 대형 화폭에 담은 획기적인 명화. 안타깝게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마찬가지로 <오르낭의 장례식> 또한 같은 맥락에서 평범함에 주목합니다. 이 시골의 장례식은 농민들의 거친 얼굴과, 엄숙한 분위기 속 지루함을 겨우 버텨내는 인파의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에서도 위대한 신들의 투쟁이나 서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특정한 인물의 특별한 이야기만을 위해 독점적으로 사용되어왔던 큼직한 캔버스는 쿠르베 덕분에 보통의 사람들로 채워질 수 있게 됩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식>, 1849-50년 / 그림 출처. 오르세 미술관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식>, 1849-50년 / 그림 출처. 오르세 미술관
벌거벗은 진실, 불편한 관능을 불러일으키다

쿠르베는 이미 파샤를 만나기 전부터 누드화를 둘러싼 여러 격렬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그 첫 시작이 바로 1853년 살롱에 출품한 <목욕하는 여인들>입니다. 그가 살롱에 제출한 첫 누드화임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의 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쿠르베는 아카데미 화풍이 고집하던 전통적 이상미를 과감히 거부합니다. 매끈하고 균형 잡힌 신체, 고대 조각에서 본 듯한 이상화된 나체 대신, 실제 시골 여성들이 냇가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그대로 화폭에 옮겨놓았습니다.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두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중 작품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여인은 물가에서 몸을 막 씻고 나온 듯한 모습으로 뒤돌아 서 있으며, 옆에 있는 여성에게 손을 흔들며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흰 천으로 맨몸을 가렸지만 그녀의 풍만한 등짝과 깊은 엉덩이 골이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당시 살롱 작품을 구경하러 온 관객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진짜 파문을 일으킨 것은 그림 속 여성들의 거칠고 흙 묻은, 거무스름하게 묘사된 발이었습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목욕하는 여인들>, 1853년 / 그림 출처. 파브르 미술관
귀스타브 쿠르베, <목욕하는 여인들>, 1853년 / 그림 출처. 파브르 미술관
이는 관람객들에게 이 여성들이 귀족이나 부르주아가 아닌, 신분이 낮은 서민 계층 여성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죠. 천한 여성의 뚱뚱한 몸과, 더러운 발을 여기까지 와서 봐야하다니… 평단은 일제히 쿠르베를 향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저속하다’와 ‘예술의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다’와 같은 반응은 약과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문학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 1811~1872)는 <목욕하는 여인들>을 보고 이런 말을 남기기도 합니다.

“물에서 막 나온 ‘호텐토트 비너스(La Vénus Hottentote, 19세기 유럽, 남아프리카 코이코이족 흑인 여성을 인종차별·성적 시선으로 부르던 모욕적 별칭)’ 같은 여인을 상상해 보라. 관람객을 향해 괴상하고 과장된 엉덩이를 내보이며, 엉덩이엔 깊은 보조개가 패여 있어 마치 장식 술단추를 달아야 할 것 같다.”

쿠르베 본인도 이런 반응을 어느정도 예감하고는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그림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심지어 격분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고백을 담담하게 털어놓습니다. 실제로 살롱이 개막되자 눈높이에 걸린 작품에는 비난과 호기심이 뒤섞인 인파가 몰렸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남들이 뭐라하든, 쿠르베는 자신이 본 것을 묵묵히 그렸고, 그의 붓질은 세상을 여러 번 놀라게 합니다. 어쩌면 그러한 쿠르베의 신념과 우직함이, 파샤로 하여금 그에게 ‘특별한’ 그림을 의뢰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칼릴 셰리프 파샤: 야릇한 나체를 모으는 수집가

쿠르베에게 <세상의 기원>을 의뢰했던 오스만 제국의 장교 출신 외교관 칼릴 셰리프 파샤는 단순한 예술품 수집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굉장한 그림 애호가였으며, 그가 소유한 그림들 중에는 방대한 여성의 누드화 컬렉션이 있었습니다. 그림 속에 표현된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여성 나체의 가치를 알아본 파샤는 조용히 움직이면서 이러한 그림들을 은밀하게 수집해 나갑니다.

그가 보유한 많은 누드화 중에는 앵그르의 <터키탕>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신비를 두른 이국적인 하렘과 그 비밀스러운 공간 속에서 다양한 출신의 여성들이 옷을 벗고 목욕을 즐기는 상상속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녀들의 맨몸은 깨끗하며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합니다. 이 그림은 서양인이 동양에 대해 가진 성적 판타지를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오리엔탈리즘의 극치를 이룹니다.

<터키탕>을 통해 이미 아름답게 미화된 여성의 나체를 소유한 파샤에게는 어쩌면 현실적인 여성의 몸을 담은 그림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환상과 현실의 여성 누드화를 모두 가지게 됨으로써 파샤는 오로지 자신만이 훔쳐볼 수 있는 나체 컬렉션을 완성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던 화가 쿠르베와 여성의 육신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회화를 탐색한 파샤. 이 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터키탕>, 1856년. 아름답고 젊은 이상적인 여성들의 육체만이 보인다. / 그림 출처. 루브르 박물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터키탕>, 1856년. 아름답고 젊은 이상적인 여성들의 육체만이 보인다. / 그림 출처. 루브르 박물관
파샤는 쿠르베에게 <세상의 기원>과 함께 또 하나의 누드화를 추가적으로 의뢰합니다. 파샤의 개인적인 취향이 듬뿍 반영된 이 작품은 훗날 우리에게 <잠>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 넓은 캔버스 속에는 두 명의 여인이 옷을 벗고 엉켜 누워 있습니다. 왼쪽의 흑발 여인은 갈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엉덩이를 보이며 비스듬히 누워있고, 그 옆에 금발의 여인이 몸을 포개어 편안히 잠들어 있습니다. 금발 여인의 팔은 흑발 여인의 다리에 툭 걸쳐져 있고, 두 여인의 다리는 서로 얽혀 있습니다. 하얀 침대 시트 위에 끊어진 진주 목걸이와 던져진 장신구는 지난 밤이 매우 격정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배경과 대조되는 여인들의 밝은 살색은 더욱 부각되어 보이며, 그녀들은 큰 거사를 치른 후 휴식을 취합니다. <잠>은 여성 간의 육체적인 쾌락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아주 진솔한 그림입니다. 동성애를 터부시하며 지금보다도 훨씬 경직되어 있던 당시 유럽 사회에서, 파샤의 색욕을 자극하는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쿠르베의 파격적인 담대함 또한 엿볼 수 있습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잠>, 1866년 / 그림 출처. 프티 팔레
귀스타브 쿠르베, <잠>, 1866년 / 그림 출처. 프티 팔레
드러난 살점 속에 감춰진 이야기

현재까지 <세상의 기원>의 탄생을 기록한 역사적 자료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쿠르베가 지인들에게 직접 보낸 서신에서도 이 그림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림 어디에도 작가의 서명이나 완성 날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쿠르베와 동시대를 살아가던 어느 제삼자가 보낸 편지에 이 그림에 대한 간략한 언급만이 있을 뿐이죠. 하지만 이 그림이 누구의 손을 거쳐왔는지를 기록한 소유자 이력만은 비교적 잘 남아 있어서, 파샤가 쿠르베에게 이 그림을 의뢰했다는 사실은 그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원>이 쿠르베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그의 고유한 화풍과 기법을 통해 추측될 뿐이었고, 훗날 캔버스 안료 성분의 정밀 분석을 통해서야 비로소 확정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원>은 여성의 가장 사적인 부위를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게다가 얼굴의 부재는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당황스럽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어떤 한 여성과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먼저 들여다보는 그녀의 은밀한 곳, 음부와 복부의 주인은 여전히 익명으로 남아있으며,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아직도 쿠르베가 누구의 신체를 그렸는지 그저 어림짐작만 할 뿐입니다.

방구석에서 세계적인 미술관으로의 험난한 여정

쿠르베가 <세상의 기원>을 완성한 순간부터, 이 그림은 유배 생활에 들어갑니다.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여성의 음부를 나타낸 이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면 받을 충격과 여론의 질타가 두려웠는지, 여러 주인들은 이 작품을 꽁꽁 숨기는 데에만 급급했습니다. 약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었던 이 그림은 어떤 전시도, 출품도, 비평도 받지 못한 채 그저 세간의 전설로 존재할 뿐이었죠.

1995년, 약 130년 만에 오르세 미술관을 통해 대중에게 이 ‘직설적인’ 그림이 공개되었을 때, 반응은 매우 즉각적이고 극단적이었습니다. 어떤 방문객들은 여성의 성기를 향해 넋을 잃고 응시하며 ‘19세기 회화의 마지막 위대한 비밀’이라고 찬양했으며, 나머지는 혀를 끌끌 차며 ‘유화로 그린 포르노’라고 일축했습니다.

하지만 한 세기 이상 은폐된 이 작품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부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세상의 기원>은 더 이상 속삭임으로만 존재하던 소문이 아닌, 모두의 시선 앞에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100년을 넘긴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논란을 일으키다

<세상의 기원>이 마침내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었을 때, 이 그림은 모더니즘을 넘어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과 같은 새로운 사상으로 변화된 사회에 놓이게 됩니다. 비록 세상이 쿠르베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게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성의 신체를 가감 없이, 꾸밈없이 보여주는 것에 대한 깊은 불편함은 여전했습니다.

<세상의 기원>은 뉴 미디어 언론과 SNS 플랫폼의 관심 대상이 되었습니다. 2011년, 페이스북은 한 사용자가 이 그림 이미지를 올렸다는 이유로 계정을 삭제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관 중 한 곳에 걸려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북의 '노골적인 성적 이미지 금지' 정책에 위배된다는 이유였죠.

이 사건은 전 세계적인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과연 알고리즘이 예술을 오해한 것일까요? 아니면 쿠르베가 이 그림을 그린 지 약 140년이 지난 후에도, 이 안에 담긴 여성의 외음부가 여전히 너무나 위험한 대상이라는 증거였을까요? 검열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그 방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세상의 기원>은 교과서에서 흐릿하게 처리되고, 온라인에서는 검열되며, 교실에서는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시대를 뛰어넘는 사실주의의 걸작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여성 혐오적이고, 관음증적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한편,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더욱 복합적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일부는 쿠르베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솔직하게 여성의 몸을 묘사한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비평가들은 <세상의 기원>을 보고, 얼굴의 부재가 대상을 익명화하고 비인간적으로 만들며, 여성을 단순히 성욕을 만족시키는 성기로 전락시켰다고 지적했습니다.

과연 쿠르베는 누드화를 신화에서 해방시킨 것일까요? 아니면 여성성을 그저 생물학적 동물로 축소시킨 것일까요? 어쩌면 이 그림은 단순히 취향을 넘어 검열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가늠하는 리트머스지 역할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이지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