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병오년(丙午年)은 ‘붉은 말의 해’이다. 흔히 말은 전진과 돌파의 상징으로 읽히지만, 말은 달리는 존재이기 전에 먹고 쉬고 병들고 회복하며, 무엇보다 어딘가에 머물 수 있어야 했다. 말에 관한 갈등이 공간의 문제로 수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란츠 마르크,〈방목하는 말들 IV〉(1911), 121×183 cm, 캔버스에 유채, 하버드 미술관 소장
붉은 말의 이미지는 사실 오래전부터 서양미술 속에 있었다.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의 〈방목하는 말들 IV(Grazing Horses IV)〉에서 붉은 말들은 질주하지 않는다. 말들은 고개를 숙여 풀을 뜯고, 서로를 살피며, 풍경 속에 ‘머문다’. 이 그림에서 붉음은 전투의 신호라기보다 생이 가진 온도처럼 화면을 따뜻하게 한다. 달리지 않는 말이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말한다. 말은 상징 이전에, 먼저 한 생명이라고.
또 하나의 붉은 말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의 작품 〈붉은 말(Le cheval rouge)〉이다. 이 작품에서 말은 화면 위를 달리지만, 그 달림은 경주가 아니다. 서커스와 음악, 연인과 떠오르는 인물들이 겹친 무중력 공간 속에서 붉은 말은 ‘승부’가 아니라 ‘서사’를 싣는다. 말이 사람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기억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듯한 장면이다.
마르크 샤갈,〈붉은 말〉(1938), 114×103 cm, 캔버스에 유채, 낭트 보자르 미술관 소장
마르크의 붉은 말이 ‘머무름’으로 생명을 증명한다면, 샤갈의 붉은 말은 ‘달림’으로 서사를 운반한다. 서로 다른 붉은 말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확인한다. 말은 인간에게 친밀한 생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오랫동안 제도 속에 편입해 온 동물이라는 점이다.
불현 듯 서울의 지명이 하나 떠오른다. 서초구 양재역 일대의 옛 이름 ‘말죽거리’다. 이 지명은 조선시대 국가가 운영하던 교통과 통신의 거점인 역참을 오가던 길손들이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며 쉬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 이름은 말이 한때 도시의 교통이자 행정의 속도였고 먼 길을 지탱하던 기술이었다는 기억을 불러온다. 말죽거리는 도시 속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고 숨을 돌리게 하던 자리였다. 말은 상징이기 전에 생활이었고, 생활이었던 만큼 돌봄과 관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돌봄의 기억이 곧장 거래의 현실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회화는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로자 보뇌르,〈말시장〉(1853-55), 245×507 cm,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로자 보뇌르(Rosa Bonheur)의 〈말시장(The Horse Fair)〉에서 말은 ‘생명’이면서 동시에 ‘가격’이 되는 순간을 한 화면에 고정한다. 그림은 파리의 가로수길인 불바르 드 로피탈에서 열린 말시장을 묘사하고 있는데, 사람과 말이 뒤엉킨 역동적이고 거대한 장면 속에서 힘은 가격이 되고, 움직임은 거래가 된다. 말죽거리가 “먹이는 자리”라면, 말시장은 “값을 매기는 자리”다.
이 돌봄과 거래 사이에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의 〈휘슬재킷(Whistlejacket)〉이 놓인다. 배경도 기수도 지운 채, 말 한 필을 거의 실물 크기로 세워 ‘한 존재’로서의 말을 전면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그 말이 경주마로서 쌓아온 승리와 은퇴의 이력은, 존재와 성과가 한 몸에 겹쳐 있음을 조용히 드러낸다. 그림의 제목인 〈휘슬재킷〉은 바로 그 경주마의 이름이다. 말은 사랑받지만, 동시에 성과로 분류되고, 성과는 다시 시장과 규칙을 강화한다.
조지 스텁스,〈휘슬재킷〉(1762), 296×248cm, 캔버스에 유채, 내셔널 갤러리 소장
그럼에도 말과 인간의 관계는 끝내 ‘지배’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인간이 말을 탄다는 것은 단순히 말에 올라타는 일이 아니다. 체중의 이동, 무릎의 각도, 손끝의 압력 같은 미세한 신호를 말이 받아들일 때에만 성립한다. 그래서 말과의 교류는 권력이기보다 협상에 가깝고, 그 협상의 다른 이름은 신뢰다. 서커스의 말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순간도 결국 ‘복종’이 아니라 ‘호흡’이 보일 때이다.
근대의 경마장은 인간과 말의 관계를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세련되게 조직한다. 노동과 이동의 말은 경기의 말이 되고, 경기는 관중과 규칙, 자본의 구조로 편입된다. 말의 속도는 자연의 속도가 아니라 제도가 설계한 속도가 된다. 그리고 그 장면을 한 컷으로 압축해낸 것이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의 〈롱샹의 경주(The Races at Longchamp)〉이다.
에두아르 마네,〈롱샹의 경주〉(1866), 44×84.2cm,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 미술관 소장
마네는 19세기 파리에서 인기있었던 롱샹 경마장의 풍경을 담았다. 마네는 말과 기수가 관람자를 향해 밀려오는 정면 구도를 포착하여, 경마를 ‘달리기’가 아니라 ‘달리도록 조직된 장면’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에는 단지 속도의 쾌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트랙 주변의 관중석은 한 도시를 축제로 꾸미는 방식이고, 경마가 있는 날의 열기는 파리의 주말을 하나의 시간표로 묶는다. 모자를 쓴 군중, 차양 아래의 시선, 출발 직전의 정적과 결승선 근처의 함성. 이처럼 경마장은 말의 힘이 도시의 생활 리듬으로 전환되는 곳이다. 말이 질주할수록, 군중의 함성은 더 커지고, 규칙은 더 정교해지며, 돈은 더 빠르게 순환한다. ‘달리는 말’은 어느새 도시가 스스로를 가동하는 엔진처럼 보인다. 즐거움이 커질수록, 공정과 통제의 필요도 함께 커진다. 그래서 경마장은 단순한 여가 공간이 아니라—도시가 허용하는 흥분과 도시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 한 자리에 포개지는 곳이다.
그렇다면 과천의 경마장이 ‘도시 문제’로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은 우리 법체계에서 여러 겹의 지위를 동시에 갖는다. 말산업은 경마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육·훈련·유통은 물론 승마·관광, 수의·장제 등 관련 서비스까지 포괄한다. 「말산업 육성법」은 말산업의 범위와 지원 체계를 정하고, 「한국마사회법」은 경마를 공정하게 시행하기 위한 운영 구조를 마련한다. 반면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법」은 경마를 사행산업으로 분류해 부작용 통제의 틀 안에 둔다. 그리고 말은 산업 이전에 동물이므로 「동물보호법」의 생명·복지 원칙이 바닥에 깔린다. 결국 이 네 가지 언어—육성, 운영, 감독, 보호—가 한 현장에서 맞물리는 순간, 말은 곧 도시의 문제가 된다.
이제 붉은 말의 현실로 돌아오자. 2026년 1월 정부는 과천 경마장과 국군방첩사령부를 이전하고, 이전 부지를 활용해 9,800호 규모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과천에서는 이전 반대의 목소리가 커졌고, 다른 지역에서는 유치 가능성을 두고 계산이 시작됐다. 경마장은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국내 대표 레저·문화 공간이어서 지역 경기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고, 지방자치단체가 경마장에서 얻는 세금도 막대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내세우며 결의대회를 열고 철회를 요구했다.
과천경마장에서 달리는 경마들 / 출처. 국립과천과학관 홈페이지
나는 경마장 근처에 살아 이 변화가 ‘보도자료의 문장’에서 ‘동네의 풍경’으로 바뀌는 과정을 본다. 무엇보다 아쉬움이 먼저 밀려온다. 1989년 개장한 렛츠런파크 서울은 경마를 베팅하는 경마장 뿐만 아니라 포니랜드와 말박물관 등 한 시대가 말을 두었던 자리였고, 말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이 축적되어 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도시가 시설 하나를 잃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도시가 관계의 장소를 잃는 일은 흔하지 않다. 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이 머물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이 사라지는 것이라면 더 그렇다. 말이 도시에서 사라질 때 우리가 잃는 것은 레저 시설 하나가 아니라, 인간이 오랫동안 동물과 주고받아 온 교류의 문법일지도 모른다. 붉은 말의 해에 묻고 싶다. 우리는 경마장을 옮길 수는 있어도, 말과 인간이 만나던 ‘관계의 자리’까지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