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9년 여름, 갓 스무 살이 된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역마차에 올랐다. 약간은 긴장했던 런던 일정이 끝나고 이제야 진정 원하는 여행길에 나선 참이었다. 그가 가려는 곳은 런던에서 600km 이상 떨어진 스코틀랜드였다. 유럽에서는 물론 영국 안에서도 변방인 곳이었지만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부터 이 북쪽 지방을 동경해왔다. 역마차를 갈아타고 가야 하는 먼 길도 젊은 여행자에게는 고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함부르크 태생의 멘델스존은 음악계 전체에서도 손꼽을 만한 ‘금수저’였다. 그의 할아버지 모제스 멘델스존은 독일어권 전체에 명망을 떨친 철학자였고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크게 성공한 은행가, 어머니 레아는 다섯 개 언어에 유창한 지성인이었다. 남부러울 데 없는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여섯 살 때부터 누나 파니와 함께 피아노를 배웠고 아홉 살에 연주회 무대에 섰으며 열세 살에 피아노 4중주를 작곡했다.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부모는 음악가의 길을 적극 밀어주기로 작정하고 작은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선물했다. 열두 살이 된 해에 멘델스존은 집안의 주선으로 대문호 괴테를 만났다. 괴테는 “요즘은 신동이 예사롭지 않지만, 이 아이는 정말 특별하군!”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괴테는 멘델스존에게 어른이 되면 이탈리아로 ‘그랜드 투어’를 가서 견문을 넓히라고 조언했다. 괴테는 일찍이 이탈리아에 2년 가까이 머물며 많은 영감과 창작의 열정을 얻었고, 이 경험을 ‘이탈리아 기행’에 담았다. 멘델스존은 공손한 태도로 대작가의 말씀을 경청했지만 정작 그가 꿈꾸던 나라는 따로 있었다. 그는 열일곱 살에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을 작곡할 정도로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팬이었다. 셰익스피어와 월터 스콧을 낳은 나라, 영문학의 본고장 영국에 가보는 것이 천재 소년의 꿈이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멘델스존은 영국 여행길에 올랐다. 마침 런던의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로부터 초청도 받은 참이었다. 런던 연주를 마친 멘델스존은 월터 스콧 소설의 무대, 스코틀랜드로 향했다. 에든버러를 거쳐 스코틀랜드의 서해안인 헤브리디스 제도까지 돌아보는 본격적인 일정이었다. 배를 타고 나간 멘델스존은 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척박하고 쓸쓸한 바다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곳은 스태퍼 섬의 해변에 자리잡은 거대한 해식 동굴과 그 동굴 안으로 파도가 밀려드는 광경이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 동굴에 전설의 거인 핑갈이 살았다며 ‘핑갈의 동굴’이라고 불렀다.
1772년에 출판된, 존 클레블리 주니어(John Cleveley Jnr.)가 핑갈의 동굴을 스케치한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판화.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772년에 출판된, 존 클레블리 주니어(John Cleveley Jnr.)가 핑갈의 동굴을 스케치한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판화.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900년경 핑갈 동굴 모습 / 사진출처. wikiwand
1900년경 핑갈 동굴 모습 / 사진출처. wikiwand
멘델스존은 누나 파니에게 쓴 편지에서 “이 바다가 내게 얼마나 특별한 영감을 주었는지 몰라… 머릿속에 떠오른 악상을 마구 써 봤어. 몇 마디만 적어 보낼게”라며 뱃전에서 떠오른 멜로디를 그려보냈다. 베를린의 집으로 돌아온 멘델스존은 악상을 정리해 관현악 서곡 ‘핑갈의 동굴’을 완성했다. 10분 정도 길이인 단악장의 관현악곡에서 작곡가는 바람과 함께 고요하던 바다가 삽시간에 요동치며 거센 파도가 일어나는 광경을 묘사했다. 바그너가 ‘음악으로 그린 수채화’라고 찬탄한 ‘핑갈의 동굴’은 1832년 5월 12일 런던에서 초연되어 격찬을 받았다.

[핑갈의 동굴 (존 엘리엇 가디너 /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에트르타, 차가운 파도와 바람을 담은 그림

‘핑갈의 동굴’은 쓸쓸하면서도 낭만적인 음악이다. 흐린 하늘과 바닷바람, 소금 냄새가 그대로 밴 듯한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북해의 바다가 갓 스물의 작곡가에게 얼마나 큰 영감과 흥분으로 다가왔는지 절로 실감이 된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량이 지난 1880년대 초, 노르망디 해변에서 중년의 화가가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화가는 반세기 전 헤브리디스 제도를 바라보던 젊은 작곡가와는 또 다른, 세상의 풍파와 고통을 고스란히 담은 눈으로 에트르타의 절벽과 그 절벽을 때리는 파도를 보고 또 보았다. 화가의 이름은 클로드 모네(1840~1926)였다.

모네는 1880년 초부터 중반까지 오십여 점의 에트르타 바다와 절벽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크지 않은 캔버스의 작품들이다. 모네는 바닷가의 바위에 이젤을 묶어놓고 이 그림들을 그렸다. 바닷바람 때문에 큰 캔버스를 고정시키기는 어려웠다. 세찬 바람 속에서, 때로는 어둠과 빗줄기가 몰려드는 속에서 모네는 거듭거듭 바다와 절벽을 그렸다. 이렇게까지 그림에 절박하게 매달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즈음 모네는 거센 파도보다 더 사납고 모진 인생의 파고를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석양의 에트르타. 클로드 모네, 1883년, 캔버스에 유채, 66.0 x 70.0 c m, 낭시 미술관 /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석양의 에트르타. 클로드 모네, 1883년, 캔버스에 유채, 66.0 x 70.0 c m, 낭시 미술관 /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1879년, 모네의 아내 카미유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둘째 아들 미셸을 낳은 뒤부터 시름시름 앓던 아내에게 모네는 제대로 된 치료도 해주지 못했다. 비통함이 뼈에 사무쳤던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 곤궁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미유가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모네는 후원자인 에르네스트 오슈데의 아내 알리스와 내연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내가 건강을 잃고 마침내 세상을 떠난 데에는 모네의 책임도 분명 있었다.

모네는 장과 미셸, 아직 어린 두 아들을 키워야 했다. 알리스 오슈데의 남편 에르네스트는 사업이 망한 후 집을 나가 행방이 묘연했다. 모네와 알리스는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 모네는 알리스의 여섯 아이들과 자신의 두 아이, 여덟 명의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모네를 무겁게 짓눌렀다. 돈에 쫓긴 모네는 화상 뒤랑 뤼엘에게 채 완성되지 않은 그림까지 미리 팔았다.

괴로움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떠돌던 에르네스트가 간혹 알리스를 찾아와 모네와의 일은 다 없었던 것으로 하고 다시 예전처럼 살자고 애원하곤 했다. 모네는 과거의 후원자(에르네스트는 모네의 ‘해돋이, 인상’을 구입해준 인물이었다)를 차마 보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에트르타의 거센 파도와 절벽을 그리며 타는 마음을 달랬다. 긴 무명 생활을 버틴 모네였지만 앞날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바다 위로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에야 모네는 붓질을 멈추고 이젤과 캔버스를 챙겨 바닷가를 빠져나오곤 했다. 밀물이 발 아래 들어오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리다 캔버스가 바다로 떠내려가는 사고를 겪은 적도 있었다.

에트르타를 그린 모네의 그림들은 과감하고 거친 붓질, 그리고 대담한 색채로 마무리되어 있다. 하늘과 바다가 요동치는 가운데 수평선 너머로 해가 막 가라앉은 참이다. 이 색채와 붓질은 어찌 보면 이젤 앞에 선 모네의 어지러운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덕적인 잣대로 본다면 모네의 행동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모네는 자신에게, 그리고 그림에게 언제나 충실했을 뿐이다. 모네가 훗날 쓴 편지에서처럼 화가는 ‘그저 자연에서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 열망이 모든 고통을 이기고 모네를 살게 만든 힘이었다. 에트르타 풍경화에 담긴 코끼리 절벽,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대기와 요동치는 바다에 맞서듯이 우뚝 선 절벽은 모네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석양의 에트르타. 클로드 모네, 1883년, 캔버스에 유채, 60.5 x 81.8 c m,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 /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석양의 에트르타. 클로드 모네, 1883년, 캔버스에 유채, 60.5 x 81.8 c m,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 /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1891년 에르네스트 오슈데가 사망했다. 이듬해에 모네와 알리스는 결혼했다. 동료 화가 구스타프 카유보트가 결혼식의 증인이 되어 주었다. 모네는 알리스를 마음 깊이 사랑했고 집을 떠나 스케치 여행을 갔을 때는 언제나 애정이 담긴 편지를 아내에게 보냈다. 알리스가 1911년 사망할 때까지 두 사람은 평온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스무 살의 멘델스존이 본 바다는 거칠고 척박하지만 동시에 낭만적인 바다였다. 멜로디에 담긴 처연함마저 먼 이국에 대한 순진무구한 동경을 담고 있는 듯하다. 마흔셋의 화가, 중년이 될 때까지도 어둠 속에 잠겨 있었던 모네가 본 바다는 달랐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인생의 회한이 녹아들어 있는 바다였다.
세상을 떠나는 카미유 모네. 클로드 모네, 1879년, 캔버스에 유채, 90.0 x 68.0 c m, 오르세 미술관 /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세상을 떠나는 카미유 모네. 클로드 모네, 1879년, 캔버스에 유채, 90.0 x 68.0 c m, 오르세 미술관 /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전원경 예술 전문 작가•세종사이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