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우리는 건축가를 건물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건축가가 건물을 실제로 짓는 경우는 (아예 없진 않지만) 거의 없다. 대신 건축가는 주로 건물을 설계하거나 디자인한다. 달리 말해, 건축가의 주요 업무는 건물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자신이 상상한 것을 다양한 매체와 도법으로 그려내고, 그것을 다시 삼차원 모형으로 만드는 등의 과정을 거쳐 앞으로 지어질 건물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일이다. 물론 이런 상상하기-그리기-만들기가 꼭 하나의 선을 따라 순서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창의적인 작업이 그렇듯이, 건축설계도 수많은 피드백과 루프 과정을 거친다. 새로운 그리기와 만들기를 통해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발견하고, 이런 발견을 계기로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그리고 만드는 과정. 이런 과정의 무한반복이 곧 건축설계다.
건축설계가 무한반복일 수 있는 것은 건축가에게 풀어야 할 문제가 수학 문제처럼 답이 정해진 게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설계 과정이 늘어지면 늘어질수록, 건축가가 그리는 그림과 모형도 쌓여만 간다. 이 자기 만족적이지만 고통스러운 반복 과정에 억지로 마침표를 찍어주는 구세주는 결국 마감 기한이다.
기한이 되면 건축가는 방황을 멈추고 마침내 답을, 최선의 계획안을 내놓아야만 한다. 앞으로 지어질 수도 있는 건물의 전체 이미지를 더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이런 건물 이미지를 다른 사람도 알아볼 수 있도록, 특히 건물을 실제로 짓는 시공자에게 오류 없이 정확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건축가의 의도대로 건물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위해, 곧 건축가가 그린 이미지와 실제 건물이 일대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고안된 그림이 바로 건축 도면이다. 건축 도면은 대개 화법기하학(descriptive geometry)을 바탕으로 약속된 상징체계에 따라 기계적으로 그려진다. 평면도와 단면도와 입면도, 건물이 놓이는 주변 맥락을 보여주는 배치도, 건물의 세부사항을 명시하는 상세도나 설계설명서. 이들이 모두 일반적으로 건축 도면에 속한다.
오늘날엔 이미 익숙한 분업화, 곧 그리는 건축가(architect)와 짓는 시공자(builder)가 각각의 전문직으로 나눠진 것은 근대의 일이다. 물론 이 근대적 분업화는 오랜 세월을 거쳐 진행된, 그리고 지역에 따라 그 상황이 천차만별인 역사적 과정이다. 서구 건축사에선 대략 그 분기점을 15세기로, 그 장소는 르네상스가 꽃핀 피렌체로 잡는다. 이런 서구 중심 역사 서술에 따르면, 피렌체 두오모의 설계와 시공을 도맡았던 브루넬레스키는 중세 우두머리 장인과 근대 건축가 사이 경계에 서 있다. 알베르티가 1450년에 야심 차게 내놓은 건축이론서 『건축십서』엔 이런 말이 있다. 정확한 "리네아멘타(lineamenta, 윤곽선들)"만으로 "질료에 기대지 않은 채 마음에서 온전한 형태를 미리 그릴 수 있다." 이렇게 추상의 선으로 사물을 미리 그리는 행위가 바로 알베르티를 비롯한 당대 예술가가 규정한 "디세뇨(disegno)", 곧 "디자인"이었다. 알베르티의 기획은 결국 시공 현장에서 건축가(디자이너)를 해방(혹은 추방)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14세기 시공 현장을 묘사한 도메니코 디 바르톨로의 그림에서 이른바 ‘건축가’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컴퍼스를 들고 부재 치수를 재면서 주교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우두머리 장인’이다.
호레이스 베르네, 교황 율리오 2세와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1827.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후 이어진 인쇄 혁명과 유럽 출판시장의 성장은 건축가의 계획안이 도면의 형식으로 건축서, 곧 책에 실려 출판, 배포될 가능성을 열었다.
1537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세를리오의 『제4서』 초판에 실린 다섯 가지 오더 도판. 이 책은 르네상스 고전건축을 전 유럽에 확산시킨 당대 건축계의 베스트셀러였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품
15세기 이후 건축의 자리는 시공간에 묶여 움직일 수 없는 현장에서 시공간을 가로질러 움직일 수 있는 페이지 위로, 곧 허구의 세계로 옮겨갔다. 건축이 시공 현장을 벗어나 책의 페이지 위에 있을 수 있다면, 물리적인 건물은 이제 건축의 전부가 아닌 일부일 뿐이다. 건축 도면이나 모형이 꼭 건물이 되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도면이나 모형 자체로 건축일 수 있다는 생각. 이 생각을 확장하면, 건축이 꼭 도면이나 모형일 필요도 없다. 각종 드로잉이나 텍스트나 심지어 가상공간도, 달리 말해 어떤 실제나 허구의 사물도 건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건물을 짓기까지 현실에서 넘어야 할 허들은 너무 많다. 이 수많은 허들을 넘더라도 건축가의 아이디어나 계획안이 온전히 건물로 실현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건물을 지으려면 우선 빈 땅이 필요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 기술과 인력과 자재가 필요하고, 이 모든 것을 동원할 수 있는 자본이 필요하다. 게다가 건물은 우리 삶의 그릇이자 도시를 이루는 꼭 필요한 것이기에, 본질적으로 공공의 것이며, 이런 까닭에 건물 짓기는 사회적 제도와 윤리, 그리고 법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건물은 그래서 대체로 실험적이고 급진적이기보다 안정적이고 익숙한 쪽으로 구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건물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때로는 검증된 익숙함을 넘어 그 의미와 한계를 급진적으로 되묻는 건축 실험이 필요하다. 건축가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도시와 건축의 현 상황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건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과감하게 실험하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실험과 제안에는 리스크가 따른다. 그러나 애초에 건물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건축가는 큰 사회 경제적 비용을 들이지 않더라도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테스트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건물은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 가장 부적합한 수단일 수 있다.
예술가는 대부분 자신이 직접 다루는 사물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건축가도 마찬가지다. 아직 설계 과정에 있는 건물은 건축가의 손에서 멀리 떨어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의 것이다. 그러나 도면이나 모형은 건축가의 손이 직접 닿는 지금 이곳의 사물이다. 시인이 언어에 몰두하듯이, 화가가 캔버스와 물감에 몰두하듯이, 건축가가 건물보다 자신이 직접 다루는 매체, 곧 도면이나 모형 등에 몰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현대시나 현대미술이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에서 벗어나 그 표면과 형식에 몰두했듯이, 현대건축에서도 도면이나 모형이 그것이 가리키는 건물에서 벗어나 그 표면과 형식에 몰두하며 자기 참조로 작동하는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세상에 건축가는 많지만, 세상에 지어지는 건물의 개수는 상대적으로 적다. 모든 건축가에게 그럴듯한 건물을 설계하는 기회가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실제 건물로 만족스럽게 구현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까닭에, 그리고 때로는 건축가가 자신의 건축적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적합한 수단이 꼭 건물은 아닐 수도 있는 까닭에, 건축가는 일종의 사이드프로젝트로 건물을 설계하는 일 말고도 다양한 일을 한다. 건축적 리서치와 사고 실험, 꼭 그 목표가 건물 짓기가 아니어도 좋은 건축 드로잉이나 모형 만들기, 잠깐 섰다 사라지는 파빌리온 짓기, 설치 작업, 가구 제작, 글쓰기와 출판, 전시 큐레이팅, 패션 디자인, 다양한 건축 굿즈 제작과 판매 등이 이런 사이드프로젝트의 사례다. 좋은 건물은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중요한 존재지만, 무겁고 둔하다. 더 날래고 가벼운 방식으로 (건물 아닌) 건축을 구현하는 다양한 전략을 동시대 건축가는 늘 모색 중이다.
다이아거날 써츠(Diagonal Thoughts)의 「Minimum House: Two Rings, Layered House」(2025)는 건축 도면, 모형, 시, 렌더 이미지 등을 혼용한 일종의 건축적 사고 실험이다. 건축가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두 개의 공간 고리, 곧 일상의 기능을 충족하는 ‘필연의 건축’과 유동적이고 불확정적인 ‘생성의 영역’이 서로 얽힌 최소한의 주택을 제안하는데, 외곽을 둘러싸는 '필연의 건축’이 몸의 방향과 위치, 빛에 의한 시선의 이동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질서를 이룬다면, 중심에 놓인 '생성의 영역'은 다양한 삶의 행위가 펼쳐지는 무대이자 피난처로, 때로는 그림자로만 이뤄진 방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