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 출처. National Portrait Gallery 홈페이지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 출처. National Portrait Gallery 홈페이지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묘한 시선을 느꼈다. 내가 작품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얼굴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얼굴은 모두 다른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었다. 영국의 왕도 있었고 이름난 작가나 가수도 있었다. 이들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은 이렇게 수많은 얼굴로 가득했다.

초상화 미술관은 1856년에 역사적 인물들의 얼굴을 통해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취지로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국회의사당과 정부 기관이 모여 있는 웨스트민스터 주변에 있었다. 그러다가 1896년에 트라팔가 광장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의 컬렉션은 특정 시기의 화풍이나 매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뛰어난 예술가가 그린 작품만 모으는 것도 아니다. 이 미술관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누가 그렸는지가 아니라 누구를 그렸는가이다. 초대 운영위원회가 세운 원칙이었다. 그 결과 컬렉션은 왕실과 귀족, 주요 정치가와 군인, 예술가와 사상가 등 ‘영국의 얼굴’들의 초상이 주로 포함하고 있다. 의미 있는 인물을 담았다면 회화는 물론이고 사진이나 조각도 수집했다.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입구에 위치한 초상 조각들 / 사진. © 김선경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입구에 위치한 초상 조각들 / 사진. © 김선경
그렇다면 영국의 얼굴들은 과연 누구인가? 상설전은 연대순 배열을 기본으로 한다. 가장 오래된 초상화들은 건물의 위층에 놓여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현재에 가까워진다. 상설전의 초반부에는 대영 제국의 기틀을 다진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의 초상화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왕권을 강화해 영국을 하나의 국가로 정비하고 이후 해상 강국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초상화도 찾아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초상은 대영 제국의 역사보다는 영국 문학 전반을 대표하는 얼굴로 미술관에 자리하고 있다.
화가 존 테일러가 그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화 (1610년경), National Portrait Gallery Collection / 출처. Wikimedia Commons
화가 존 테일러가 그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화 (1610년경), National Portrait Gallery Collection / 출처. Wikimedia Commons
20세기 후반 인물을 모은 곳으로 내려오자 역사 교과서보다는 텔레비전에서 볼법한 얼굴이 많았다. 글램 록을 대표하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1947–2016), 1960년대 영국의 대중음악 판도를 흔든 비틀즈(The Beatles)멤버들, 그리고 레게 음악을 대표하는 밥 말리(Bob Marley, 1945–1981)가 그러하다. 이들의 초상화를 보자 박물관이 한 시대가 느낀 감성을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게 음악을 대표하는 자메이카 출신 가수의 초상화를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 걸어 놓았다는 사실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떠올렸다. 밥 말리가 런던에서 활동하며 남긴 흔적들과 영국 음악과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을. 초기 컬렉션 이후에는 미술관이 ‘영국 국립’이라는 명칭보다 ‘초상화’라는 장르 자체에 더 무게를 두기 시작하는 듯했다.

1층에는 최근에 수집한 초상화들을 모아둔 전시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영국 유명 밴드 원 디렉션(One Direction) 출신 가수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 1994- )를 마주했다. 한때 전 세계의 10대 소녀들의 가슴을 뛰게 한 스타일스의 사진을 미술관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그의 초상이 유난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너무나 동시대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미디어와 SNS를 통해 이미 수없이 소비된 이미지가 오랜 초상화와 같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곧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미술관의 벽에 걸린 다른 인물들 역시 그 시대에는 가장 핫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사는 이들의 얼굴 역시 언젠가 초상화에 담겨 어느 우아한 건물 벽에 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내가 현재라고 느끼는 이 시간도 언젠가는 기록되고 분류되는 과거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지 않았을까?

시대순으로 감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초상화를 그리는 형식의 변화도 느낄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초상화는 어두운 배경 앞에 인물을 배치하고 얼굴을 또렷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보통 인물의 시선은 마치 우리가 여권 사진을 찍을 때처럼 정면을 향했다. 누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 그것이 오랫동안 초상화가 맡아온 중요한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상화가 얼마나 진실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지금의 포토샵 기술처럼 당시에는 화가들의 손질로 조금 더 아름답게 표현되기도 했을 것이다.
[좌]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전시 전경 [우] 팝 아티스트 앨런 존스가 제작한 발레리나 다시 버셀의 초상화(1994년) / 사진. © 김선경
[좌]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전시 전경 [우] 팝 아티스트 앨런 존스가 제작한 발레리나 다시 버셀의 초상화(1994년) / 사진. © 김선경
시간이 흐르면서 초상화의 형식은 다양해졌다. 한눈에 초상으로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 역시 초상화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영국 유명 발레리나 다시 버셀(Darcey Bussell, 1969- )의 초상이 그 예이다. 버셀의 초상화는 팝 아티스트 앨런 존스(Allen Jones, 1937- )가 1994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그림에서 바셀은 정면을 보고 있지 않다. 시선은 왼쪽을 향하고 있으며 몸은 길게 늘어선 채 균형을 잡고 있다. 얼굴은 묘사가 자세하지 않다. 배경도 마찬가지다. 인물의 정체를 암시하는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인물을 알아보게 하는 단서보다 회화적 표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러운 피부색 대신 사용한 노랑과 주황 그리고 회색 같은 색들 말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초상화 박물관에 걸려 있지 않았다면 특정 인물을 그린 그림이라고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쳤을 것 같았다.

과감한 색의 사용은 존스가 바셀의 움직임과 에너지에서 느낀 인상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다. 바셀이라는 인물을 ‘정확히’ 재현하기보다 그가 지닌 생동감과 리듬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얼굴을 닮게 그리는 것만이 초상화의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작가가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가 그 인물의 얼굴만큼이나 또렷하게 남는다. 버네사 벨(Vanessa Bell, 1879-1961)이 그린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의 초상도 그렇다. 그림 속 울프는 안락의자에 몸을 맡긴 채 혼자만의 생각 속에 머무는 듯 보인다. 얼굴은 또렷하지 않고 윤곽이 부드럽게 흐려져 있다. 이 초상은 위대한 작가의 얼굴을 보여주기보다 가까운 사람이 그를 조용히 바라본 순간을 남긴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울프에 대한 정보보다 감상의 결과에 가깝다.
화가 버네사 벨이 그린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화(1912년) / 사진. © 김선경
화가 버네사 벨이 그린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화(1912년) / 사진. © 김선경
그리는 이의 시선은 초상화에서 새삼스러운 요소가 아니다. 초상화의 형식과 모델이 되는 대상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이 장르에서 언제나 존재해온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시선이었다. 초상은 늘 누군가가 누군가를 바라본 결과이다. 그래서 초상에는 늘 그 인물에 대한 동시대의 시선이 함께 담긴다. 존경이었을 수도 있고 호기심이나 애정, 때로는 거리감이나 비판이었을지도 모른다.

영국 국립 초상 미술관은 인물들을 따라 역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초상 뒤에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과감하게 작가의 시선이 남아있다. 이 시선을 함께 읽어낼 때 더 재미있게 미술관을 즐길 수 있었다.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전시 전경 / 사진. © 김선경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전시 전경 / 사진. © 김선경
김선경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