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줄라이 페스티벌의 어느 날이었다. 예약한 관객의 명단을 정리하던 한진희 매니저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의아해했다.
“이 임윤찬이 설마 그 임윤찬은 아니겠지?”
그 공연은 피아니스트인 그가 관람할 거라 예상하기 어려운 합창 공연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우리가 아는 임윤찬이라면, 명단에서 발견한 그 이름이 정말 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공연 당일, 입장하는 관객들 틈에서 검은 캡 모자를 눌러쓴 ‘그 임윤찬’이 등장했다. 객석에 조용히 앉은 그의 모습을 바로 알아보는 관객은 많지 않았다. 하우스콘서트 무대에 오른 친구를 응원하기 위해 참석한 그가 공연 후 친구와 인사를 나눌 때가 되어서야 몇 사람만이 그를 알아봤을 뿐이다. 나는 왜 임윤찬에게 그런 특별한 인상을 받았을까. 아마도 하우스콘서트 무대 안팎에서 보여준 그의 한결같은 태도 때문일 것이다.
2021년의 첫 만남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2021년 신년음악회 실황 / 사진제공. ⓒThe House Concert
임윤찬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2021년 신년음악회에서 소개할 예정이던 그는 이미 음악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젊은 피아니스트였다. 17세의 나이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앞서 2019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드러낸 신예였다.
새로운 연주자와의 무대를 우리는 무척 기대했지만, 팬데믹은 거대한 장벽이었다. 예술가의집은 다시 악화된 상황으로 인해 2020년 12월부터 문을 닫았고, 새해가 되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오래가지 못했다. 약속된 공연을 무기한 미룰 수만은 없어, 결국 ‘무관중 생중계’라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해야 했다. 다행히 그 부탁이 받아들여져 공연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임윤찬의 첫 하우스콘서트는 그렇게 관객이 없이, 오직 유튜브 생중계를 위한 무대로 진행해야 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함께한 2021년 신년음악회 공연 현장. 무관중 생중계로 진행됐다. / 사진제공. ⓒThe House Concert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윤찬은 이 무대에서 자신의 음악적 잠재력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생중계를 위한 최소한의 스태프만을 앞에 둔 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이어간 연주는 프로그램의 구성에서도 빛을 발했다. 당시 프로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꼽은 스크리아빈을 첫 곡과 마지막 곡에 배치하고, 그 사이로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를 놓아 흐름을 만들었다. 전체가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지는 이 프로그램은 마치 독립된 서사를 가진 것처럼 보였고, 임윤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곡을 쉼 없이 연주함으로써 그 서사를 완성했다.
낭만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는 작곡가들 사이에 낯선 이름이 하나 등장하기도 했다. ‘Hanurii Lee’라는 영어 표기로 전달받은 2006년생의 이 작곡가는, 당시만 해도 한글 표기조차 알려지지 않은 신진이었다. 내가 영어 표기를 있는 그대로 읽어 ‘이하누리’라고 발음했던 기억도 난다. 본명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생소했지만, 그는 이후 임윤찬의 리사이틀 (통영국제음악제, 런던 위그모어홀 등) 프로그램에 꾸준히 등장하며 ‘이 시대의 뛰어난 작곡가’로 소개된 이하느리였다. 돌이켜보면, 2021년 하우스콘서트와의 첫 만남은 신진 작곡가 이하느리를 자신의 연주를 통해 가장 먼저 소개한 순간이기도 했다.
페루치오 림이 선사한 연말 무대
그해 연말, 임윤찬은 또 다른 방식으로 하우스콘서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첫 만남의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두 대의 피아노로 친구와 함께 연말 공연을 하고 싶다는 제안을 먼저 보내온 것이다. 일정을 조율한 뒤 자료를 기다리고 있는데, 알쏭달쏭한 팀명과 프로필, 그리고 사진이 한 장 도착했다. 팀명은 ‘쟂듀오(JJAT DUO)’. 소개는 이러했다.
쟂듀오는 우주에서 태어났으며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그들은 12차원을 넘어서는 우주의 소리를 탐구합니다. (중략)… 쟂듀오는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이라는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며, 모든 식물과 생명체들을 사랑합니다. 쟂듀오는 인류와 우주에 말합니다. "우린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쟂듀오의 두 연주자,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배진우 / 사진제공. ⓒThe House Concert
그는 홈페이지에 공지할 공연 정보에 연주자의 사진이나 통상적인 프로필 대신, 자신이 전달한 자료를 그대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쟂듀오의 멤버는 실명 대신 페루치오 림(Ferruccio Lim)과 부조니 배(Busoni Bae)라고 적혀 있었고, 첨부된 유일한 이미지 역시 인물 사진이 아니라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이었다. 출연진을 짐작할 수 없는 정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우스콘서트에서 연주자를 공연 당일에 공개하는 경우는 번개 콘서트나 연말 갈라 정도인데, 의도치 않게 또 다른 ‘연주자 당일 공개’ 무대가 마련된 셈이었다.
연주자의 프로필 사진 대신 홈페이지 공연 소개에 업로드 된 ‘창백한 푸른 점’ 이미지
자신들을 우주에서 태어났다고 소개하는 그 기발함은 어디서 왔을까? 그 엉뚱하면서도 어딘가 진지하게 느껴지는 이들의 팀 소개에 호응하고 싶어, 공간 한가운데 두 대의 피아노를 두고 관객이 그 주위를 에워싸 앉을 수 있도록 무대를 세팅했다. 리허설 시간에 맞춰 도착한 두 연주자는 예상치 못한 배치에 환하게 웃으며 박수로 화답했다.
쟂듀오와 함께한 제879회 하우스콘서트. 무대를 한 가운데로 세팅하고, 관객이 그 주위를 에워싸 앉는 형태로 진행됐다. / 사진제공. ⓒThe House Concert
만약 이 공연을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연말 공연’이라고 알렸다면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이라곤 점 하나가 보일까 말까 한 우주 이미지였고, 연주자의 이름마저 가려졌으니, 이날 공연에는 46명의 관객이 조용히 자리를 채웠을 뿐이다. 두 젊은 연주자는 생동감 넘치는 연주로 라벨의 ‘볼레로’와 ‘라 발스’, 생상의 ‘카니발’ 등을 선사했다. 두 대의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장대한 음향이 879번째 하우스콘서트를 뜨겁게 달궜다. 또 다른 음악적 자아로 분장해 열연을 펼친 두 사람은 수줍은 모습으로 앙코르 대신 짧은 인사말을 관객에게 전했다. “저희 쟂듀오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메시지였다. 유튜브 채널에 남아 있는 당시 생중계 영상에는 이런 댓글이 달려 있다.
“젊음 그 자체네요. 아름다운 시절을 사랑하는 친구와 음악과 함께하는 것 또한 큰 행복일 것 같아요. 듀오 연주로 그 젊음의 패기와 생기를 느끼며 가슴 설레고 갑니다. 최고의 연주!!”
이 시대의 낭만주의자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더하우스콘서트 2021년 신년음악회 실황 / 사진제공. ⓒThe House Concert
쟂듀오의 공연 6개월 후, 임윤찬은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대회 60년 역사상 최연소 우승을 거머쥐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파이널 무대에서 선사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는 스트리밍을 통해 전 세계로 전해지며 ‘임윤찬 신드롬’을 일으켰다. 데카 클래식과의 전속 계약 등으로 이어진 그의 활약은, 이제는 공연 티켓을 구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뜨거운 인기를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세계가 그를 주목하게 된 그 순간에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람과 음악을 잇는 그의 태도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친구의 무대를 응원하기 위해 조용히 하우스콘서트를 찾았던 모습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돌이켜 보면, 하콘과의 첫 만남에서 그는 신진 작곡가 이하느리를 소개했고, 연말 무대에서는 피아니스트 배진우를 소개했으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이후에도 실력 있는 연주자를 하콘에 연결해 왔다. 데카 클래식에서 발매한 차이콥스키 「사계」 음반의 커버 아트가 오랜 친구 최호연의 작품이라는 사실 또한 그의 그런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음악과 사람을 잇는 이 마음. 나는 감히 임윤찬을 ‘이 시대의 진정한 낭만주의자’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믿는다. 그의 이런 특별하고 귀한 마음이 앞으로도 누군가의 삶을 움직이고, 또 다른 세대에 영감을 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