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건물이 건축을 압도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화려함이 본질을 대체하고, 이윤이 철학을 대신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혁신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우리는 건축적 사유의 파편들이 확신이나 맥락 없이 재조합되는 신(新)-절충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고전주의와 역사주의에 이어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절충주의는 여러 시대의 양식과 요소를 선택적으로 결합시키는 디자인 접근 방식이다. 고전주의,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출처에서 가져온 모티브, 형태, 장식 등을 혼합하여 표현하는 특징을 지녔으며, 새로운 기능과 기술에 맞춰 변용되기도 하였다. 세기말 절충주의는 위기에 처한 문명의 문화적 표현이며, 역사적 형식의 고갈과 근대의 불확실성 사이에 놓인 당시 유럽 사회의 지적 분열과 신념의 상실을 반영했다. 이는 창조적 종합이라기보다 문화적 피로의 징후, 즉 새로운 의미를 생산할 힘을 잃어버린 사회가 과거의 권위를 놓지 못한 채 건축은 피상과 인용으로만 이루어졌다. 따라서 “절충주의”라는 용어에는 부정적 함의가 깃들어 있다. 이 단어는 깊이나 필연성 없이 마구 뒤섞어 놓은 듯한, 무엇이든 허용되는 모방과 독창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대의 자유로움과 모호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다양한 양식들의 콜라주를 의미한다. 그리고 결국, 유럽의 낡은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20세기 건축은 다시 일련의 “ㅡ주의(ㅡism)”들로 정의된다. 기능주의, 구성주의, 모더니즘, 구조주의, 탈모더니즘, 해체주의. 각각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위기와 욕망으로부터 태어나 사회적·문화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며 나름의 표현 체계를 형성했다.

흔히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실제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시대의 흐름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건축가 필립 존슨이 미스의 건축을 계기로 기능주의를 국제양식으로 확장시켰지만, 미스는 결코 기능주의였던 적이 없다. 그는 공간 형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되묻는 질문을 통해 건축의 “제로포인트”에 도달하고자 했던 개념적 사상가였다. 이러한 의문 제기 행위, 즉 제로포인트를 향한 추구는 매우 중요하다. 제로포인트야말로 “다르게” 생각할 가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제로포인트에 이르지 않고서 다르게 사고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르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에 대한 의미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본질에 대한 앎 없이는 시대의 맥락에 진정으로 호응하는 다른 것을 찾아낼 수 없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설계한 시카고 연방센터.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설계한 시카고 연방센터.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당대의 문제와 필요성으로부터 탄생한 어떤 사상이나 관념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재현되어 그 표현 방식이 공통적으로 인식되고 범주화될 수 있을 때, 그것은 하나의 ‘ㅡ주의’로 명명된다. 이는 곧 그 관념이 형식화되어, 더 이상 그것을 낳은 최초의 관념을 다루지 않고도 일정한 형식을 재생산할 수 있게 된 지점을 의미한다. 형식과 관념이 분리된 것이다. 일단 형식과 관념이 분리되면, 건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단지 “건물”만이 생산된다. 오늘날 우리의 건축이 “신-절충주의”로 규정될 수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건물들이 이미 사상적 기반을 상실했으며, 따라서 건축 또한 상실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절충주의의 핵심은 건축적 표현에 대한 다원적 태도를 구현하며, 개인의 표현 자유를 조성하는 데 있다. 과거의 요소를 차용하고 결합하며 절충하여 사용할 때, 그 요소들이 이제까지의 관습에서 해방되어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된다면 매우 긍정적인 결과다. 코코 샤넬은 ‘바지’라는 기존의 단순한 요소를 다르게 사용함으로써 여성(의 움직임)을 해방한 것이지, ‘바지’ 그 자체를 해방한 것이 아니다. 꼭 새로운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무엇이 어떠한 맥락 속에서 쓰이고, 그 쓰임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영향을 확장할 수 있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건축문화는 본질이나 서사와 단절된 채 단지 새로운 것을 위한 새-새-새로운 것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새로움 그 자체에만 집착한다. 이는 모방과 독창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시대의 모호함을 상징한다. 그 결과 우리는 시대의 실제적인 문제와 필요에 대한 인식을 상실하고, 그것을 함께 해결할 능력 또한 잃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지금 건축이 부재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적 관계와 올바른 합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생태적·사회적 위기의 시대에, 우리의 건축환경은 리처드 로저스가 말한 “형태는 이윤을 따른다”를 아주 열심히 따르고 있다. 건물은 건축을 잡아먹었다. 스펙터클에 집착하는 시대착오적 구조물들이 풍경을 점령했다. 최근 한국의 한 시골 마을에 ‘메덩골정원’이라 불리는 광대한 공간이 조성되었다. 니체의 철학을 구현했다고 주장하는 거대한 건물도 우뚝 솟았다. 테마별로 다듬어진 정원과 콘크리트로 문화적 디즈니랜드화한 결정체이며, “복합문화시설”로 포장하여 수익 창출을 위한 기계다. 건축은 중산층에게 “문화”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악용되고 있으며, 돈을 지불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특권층의 문화로 소비되고 있다. 니체는 21세기 한국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대체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메덩골정원. / 사진. ⓒ 2024 Les Jardins de Medongaule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메덩골정원. / 사진. ⓒ 2024 Les Jardins de Medongaule
메덩골정원의 선곡서원 전경. / 사진 출처. 한경DB
메덩골정원의 선곡서원 전경. / 사진 출처. 한경DB
이와 같은 소위 문화관광 개발사업은 지금 한국 모든 곳에서, 서울, 해남, 제주도뿐 아니라 울릉도와 같은 작은 섬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지역을 살려야 한다는 절실함 때문에 공공 차원의 사업도 있고, 부자 개인 또는 기업의 상업적 문화관광 사업도 있다. 어떻게 저렇게 깊은 자연에 이물질 같은 콘크리트 덩어리가 법적 허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그 자체로 보면 성공 사례처럼 보이며,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인상적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시각적 감탄보다는 이러한 유행이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건축이 내용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그 자체가 내용물이 되어버린 시대 말이다. 바로 상품화될 수 있는 내용물, 단지 볼거리라는 말이다.

물론 모든 책임이 건축가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과 심지어 자연까지도 이윤 추구를 위해 상품화하는 이 사회의 시스템에 있다. 그렇기에 “왜?”라는 질문이 중요하다. 왜 이곳에 문화공간을 지어야 하는가? 이 지역이 진정으로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맥락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한 공간이어야 하는가? 문맥 없는 건물들, 새로운 스펙터클만 추구하는 건축을 잡아먹은 건물들은 그 본연의 의미와 사회적 책임을 시각적 자극으로 대신하며 복제하고 복제하여 식상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의 최근 스펙터클 중심은 성수동이다. 이곳에는 신-브루탈리즘 옆에 신-탈모더니즘, 그 옆에 신-미니멀리즘, 또 그 옆에 신-조각주의, 그리고 그 옆에 신-포버티 시크가 공존하고 있다. 성수동 일대에 새로 지어진 일부 (초)고층 아파트들은 천문학적 가격에 거래되지만, 깊고 긴 평면 구성, 전망을 위한 과도한 유리 통창, 그러나 거의 열 수 없어 환기가 불가능하고, 방들은 그저 자투리 공간 같아서 건강한 거주가 불가능한 최악의 평면을 보여준다. 이는 “ㅡ주의”들의 절충적 혼합체로, 거주의 질 대신 “다름”이라는 스펙터클을 상품화하여 시장 가치를 창출하려는 의도이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아파트 전경. [왼쪽부터] 갤러리아포레, 아크로서울포레스트, 트리마제. / 사진. 강은구 기자
서울 성동구 성수동 아파트 전경. [왼쪽부터] 갤러리아포레, 아크로서울포레스트, 트리마제. / 사진. 강은구 기자
이러한 아파트 중 상당수는 범죄적이라고 할 만큼 부실시공에 가깝다. 계획적 노후화의 경제 논리에 따라 최소한의 비용으로 지어진 이 건물들은 특정 단일 사회·경제 계층만을 위한 얇은 장식으로 감싼 일회용 구조물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물은 문화적 공공 유산이 아니라 금융 상품으로 취급된다. 개발업자와 투자자들은 부동산의 감가상각 기간인 25~30년을 기준으로 “유효수명”을 계산하고,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투자수익률 주기와 토지의 투기적 가치만을 따진다. 건물은 장기적 터전이 아니라 부동산 가격을 부풀리기 위한 일시적 도구가 될 뿐이다. 이처럼 휴대폰과 자동차 시장을 지배하는 계획적 노후화 논리가 이제는 건축에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건축가들은 이러한 시스템에 공모하고 있다. 우리 건축가는 더 이상 건축을 짓는 것이 아니라 투자를 짓고 있으며, 집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의 상징을 짓고 있다.
서울 성수동 아이아이컴바인드 사옥 전경(젠틀몬스터). / 사진. 임형택 기자
서울 성수동 아이아이컴바인드 사옥 전경(젠틀몬스터). / 사진. 임형택 기자
이러한 맥락에서 신-절충주의는 단순히 시각적·양식적 현상이 아니다. 세계화와 광범위한 정보화 시대에 믿을 구석은 점점 사라지고, 소신을 발산하기도 위험하다. 우리는 20세기 말을 꽉 부여잡고 마치 끝없는 세기말에 갇혀있는 듯하다. 우리 앞에 놓인 위기에 대응해야 할 의지는 스펙터클이라는 물결이 휩쓸어 몰아냈으며, 결국 또 한 세기를 무너뜨릴 붕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진정한 실험을 위한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이미 검증된 것을 다시 섞어 쓰는 편이 더 안전하다. 이러한 사상과 형식의 섞음은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에 해당한다.

신-절충주의 건물은 시뮬라크르다. 그것은 한때 참조하던 애초의 현실과의 연결을 잃은 도시의 모사물이자, 원본 없는 복제 또는 실재가 아닌 단순한 기호들 간의 자기참조적 체계다. 너무나 자족적이어서 그 자체로 완결된 모방이 독자적 현실이 되었다. 신-절충주의 건물의 겉모습은 눈에 띄고 의미 있어 보이지만, 그 의미는 단지 상징을 재현한 빈 껍데기다. 시뮬라크르 또는 신-절충주의 건물은 문화적·역사적 깊이와 혁신의 외양을 흉내 내지만,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그 어떤 개념적, 문화적, 물성적 연관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지금, 현재 만을 소비하며, 곧 폭발할 화산의 가장자리에서 현실을 외면한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우리의 시뮬라크르 시대를 이렇게 요약한다. “시뮬라크르는 진실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없음을 숨긴다.” 건물은 이미 상품이 되었다. 우리가 다시 기본적 필요한 본질적인 공간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건축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시뮬라크르, 형태적 다양함을 통한 새로움에 대한 환상은 진실이다. 건물들은 진실로 존재한다. 그러나 건축은 길을 잃은 채 우리가 만든 도시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송률 건축가/잡지 <SUPTEXT> 발행인·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