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달항아리·강렬한 추상회화…시작은 모두 '흙으로부터'
김환기·박영하·송현숙·이진용등
소격동 학고재 그룹전 20일까지
생성과 소멸 등 흙의 개념 탐색
'내일의 너' '컨티뉴엄' 등 눈길
소격동 학고재 그룹전 20일까지
생성과 소멸 등 흙의 개념 탐색
'내일의 너' '컨티뉴엄' 등 눈길
본관 전시장엔 새까만 흑자편호(黑瓷扁壺) 하나가 놓였다. 15~16세기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부터 조선 말까지 오랜 세월 쓰인 이 항아리가 품은 특유의 검은빛은 철분이 다량 함유된 유약을 칠해 만들어졌다. 그 위에 한국 근대화단의 거장 김환기의 ‘항아리’가 걸렸다. 흔히 달항아리라고 부르는 은은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백자대호(白磁大壺)를 그린 작품이다. 깊은 밤하늘 위에 뜬 둥그런 달의 모습처럼 흑자와 백자 그림이 제법 조화롭다. 푸른빛이 돌아 시린 느낌마저 드는 백색과 심연처럼 깊은 흑색의 조응은 마치 만물의 근원을 상징하는 흑백태극을 보는 듯하다.
전시장 한쪽에 놓인 분청사기 ‘분청자 초엽문편병’은 회색 태토 위에 하얀 백토를 입혀 거친 유약으로 마감했다. 하얗다고 하기엔 어딘가 오묘하다. 이와 한 쌍을 이루는 박영하의 ‘내일의 너’는 고대 원주민 미술에서 쓰인 천연 안료를 살려 화면 위에 거칠게 겹쳐 완성한 작품이다. 흙이 지닌 원초적 생명력을 보여주면서 거칠고 조악한 형태와 질감이 오히려 소박한 미학을 잘 드러내는 분청사기와 공명한다.
도자기를 그린 송현숙의 연작도 재밌다. 1970년대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건너간 그는 항아리나 횃대, 고무신, 명주실, 말뚝 같은 전통적 사물을 화폭에 담으며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달랬다. 한쪽 벽면을 수놓은 거대한 설치작품인 이진용의 ‘컨티뉴엄’은 압도적이다. 활자 수천 개가 모여 독특한 문양을 이루는데, 목판활자를 활용해 한 땀씩 정성을 들여 제작한 작품이다. 이렇듯 본관 전시는 흙으로 직접 빚어낸 도자기부터 고향의 정취 또는 작은 입자 하나가 모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모습 등 흙에서 연상할 수 있는 정서를 담은 회화와 설치로 이어지는 식이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릿해진 이 속에서 인간 역시 자연과 하나가 되며 소멸과 탄생의 순간을 보여준다. 지근욱은 색연필로 선 긋기를 반복해 완성한 추상회화 ‘스페이스 엔진’ 연작을 통해 땅이 붙잡는 중력에서 해방된 입자가 빛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포착했다. 전시는 오는 20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