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1977)가 개봉했을 때 그 자리, 미국인 유학생 수지 배니언이 폭우를 뚫고 도착한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탄츠 아카데미에 어머니는 없었다. 사악한 늙은 마녀만 있었을 뿐이다. 그 마녀는 그리스에서 건너온 이민자 여성이기도 했다. 극 중 등장한 남성 정신분석가가 짚어주기로, 마녀란 정통 크리스트교에서 벗어나 마법을 믿는 상태, 한 마디로 마음에 병이 든 상태이며 악의로 차 있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어서 사람에게는 오직 피해만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마녀가 이름대로 마더 서스피리오룸 한숨의 ‘어머니’라면, 그러니까 어머니로 불리는 대상이기도 하다면 과연 그렇게 부정적인 존재이기만 할까?

루카 구아다니노의 리메이크작 <서스페리아>(2018)에서 헬레나 마르코스는 마녀로만 불리지 않는다. 그녀는 무터, 즉 어머니다. “그 호칭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잖아!” 날카롭게 일갈하는 마담 블랑(틸다 스윈튼)이야말로 마르코스 무용단의 어머니 노릇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2018년도의 <서스페리아>는 총천연색, 그중에서도 붉은 조명이 두드러졌던 원작과 달리 침착하게 가라앉은 톤으로 서베를린의 1977년을 재현한다. 이때의 베를린은 서독과 동독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는 반쪽짜리 수도이자 일명 ‘적군파(RAF) 사건’으로 시위대와 경찰의 무장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장소다. 나치즘과 그에 철저히 복무했던 부모 세대에 대한 전후 세대의 환멸이 정치적 긴장감으로 넘실거리던 곳.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 영화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 영화
그 혼란스러운 ‘독일의 가을’에 나타난 수지 배니언(다코타 존슨)은 세속과 거리가 먼 미국 오하이오의 메노나이트 출신이다. 기독교 원리주의 공동체 특유의 엄혹한 훈육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집을 뛰쳐나와 뉴욕의 마사 그레이엄 센터로 향했고, 거기서 본 안무가 블랑의 작업을 잊지 못하고 마르코스 무용단의 무용수 오디션을 보기 위해 베를린으로 건너온 것이다. 블랑을 포함한 아카데미의 모든 선생들이 마녀이며, 그 창립자인 헬레나 마르코스가 소속 무용수들의 정기(精氣)와 장기(臟器)로 연명하면서 제 그릇이 될 새 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어딘가 남다른 수지의 움직임은 무용단을 뒤흔든다. 수지는 단 이틀 만에 무용수 자격과 주연을 따내면서 끝내는 버티지 못한 패트리샤(클로이 모레츠)와 올가(엘레나 포키나)의 뒤를 이어 마르코스가 기생할 새 몸으로 낙점된다. 모든 것이 순조로이 진행되는 듯 보이나 블랑은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 수지에게서 지금까지의 여자아이들과는 다른 무엇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머니 마르코스를, 아니, 태(胎)로서의 신체를 초과하는 어떤 무언가를.

전작과 마찬가지로 기숙사이기도 한 무용 아카데미는 건물 자체로 비체적 어머니의 자궁을 암시한다. 어둡고 긴 복도, 먼지로 뒤덮인 다락, 트릭으로 감춰진 문 뒤의 지하실에는 쪼그라들고 부패해가는 몸을 가진 ‘원초적 어머니’ 마르코스가 숨어있다. 이 어머니는 기만과 착취, 신체 훼손이라는 방식을 통해 군림하려 든다. 무용단의 대외적 어머니인 블랑은 그 중간 관리자로서 칼 마르크스가 「자본 I」(1867)에서 설명한 공장 감독관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블랑은 신체 탈취의 공정을 설계하여 마르코스의 재탄생에 가담하면서도, 마르코스가 젊은 무용수들의 신체적 역량을 초과하여 착취를 시도하는 일에는 제동을 거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다른 한편 블랑은 여성 무용수들의 신체 에너지를 일깨우며 걸출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작업 과정 내내 카리스마적 돌봄을 구현해낸다. 블랑이 보여주는 모습을 위선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배타적인 여성 괴물이 아니라 여성공동체 내부 질서의 권력자, 예술가로 형상화된 마녀-마더가 바로 블랑이다. 그러나 블랑은 마르코스의 체제 내에 편입되어 있을 뿐 그 강력한 어머니를 대체할 새로운 어머니가 되지는 못한다. 블랑에게는 파괴와 자비를 결합한 무자비하고 창조적인 역동이, 공동체가 아닌 자기 신체의 고유한 감응에 따라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킬 본능적이고 초월적인 역능이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의 모성은 절대 권력의 행사도, 돌봄과 미학의 윤리도 아니다. 파괴를 통해 질서를 개편하고 존재를 창조하는 근원적인 권능, 그것이 곧 마더 서스피리오룸의 자질이자 <서스페리아>가 보여주는 궁극의 마더링이다.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 영화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 영화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붉은 조명의 제의실은 '출산=파괴=창조'의 등식이 성립하는 가장 육체적이고 뚜렷이 모성적인 공간이다. 벽과 바닥이 온통 핏빛으로 물든 이 장소는, 몸짓과 충동이 전면에 나서는 카니발의 무대이자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했던 기호적 코라 언어 이전의 리듬, 호흡, 충동이 응축된 모태적 장(場)의 현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마르코스와 그 추종자들을 비롯한 구체제가 해체되고 수지가 ‘진짜’ 어머니, 마더 서스피리오룸이라는 사실이 찢기듯 드러난다.

수지 배니언은 한 개인을 넘어 스스로를 어머니로 호명하는 권능의 중심, 창조적 재편과 선택적 파괴를 행하는 능동적 마더링의 주체가 된다. 수지의 마더링은 외부에서 들어와 공동체를 장악한 마르코스식의 억압 권력과도, 예술과 규율의 힘으로 안정화된 블랑식의 온정주의와도 다르다. 신대륙에서 귀환한 딸의 몸에 잠재된 변형된 과거는, 메노나이트라는 극도로 통제된 규율의 세계를 통과해 현재의 충동으로 솟구친다. 상징계 내부로 틈입한 코라적 질서가 새로운, 아니, 이전부터 항상 존재해왔던 원형의 어머니를 격렬하게 깨워 흔든다. 이어서 마르코스로 대변되는 파시즘적 질서에 복무하던 신체들이 파열되는 난장의 리추얼이 펼쳐진다.
춤추는 마녀들, '모성'을 소환하다…영화 '서스페리아'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 영화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 영화
수지의 마더링에서 사랑과 죽음, 자비와 망각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마르코스의 제물로 희생되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된 패트리샤와 올가, 사라(미아 고스 扮)는 무엇을 원하느냐는 수지의 물음에 일제히 같은 대답을 들려준다. “죽고 싶어요.” 1977년 서베를린의 거리에서 여성 신체는 경찰 곤봉과 총탄에 맞서며 투쟁의 주체로 등장했다. 바더-마인호프 그룹의 적군파 사건은 국가폭력의 이중 잣대를 노출시킨 한편, 기꺼이 몸을 내던지고 ‘괴물’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여성 혁명가들을 전면에 드러냈다. 같은 시간대, 아르젠토가 탄생시켰고 구아다니노가 확장시킨 상상 속 무용단의 여성 신체는 마더링을 빙자한 규율 속에 압박받고 해체된다. “죽고 싶어요.” 이 지친 소원은 역사가 반복적으로 희생시켜온 여성들을 떠올리게끔 만든다. 울리케 마인호프와 구드룬 엔슬린, 나치에 의해 죽임당한 유대인과 로마니 여성들, 가부장제 아래에서 끊임없이 소모된 여성들, 20세기 독일이라는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스러져 간 무수히 많은 여성 신체들. “죽고 싶어요.” 언어로 돌아온 단단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신체에서 흘러나온 절망적인 목소리. 수지는 그 고통을 알기에 그들을 삶의 무게로부터 해방시킨다. 한숨의 어머니답게, 비탄하고도 자비롭게.

정신분석가인 요제프 클렘페러(틸다 스윈튼) 박사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하다. 박사는 자기 환자인 패트리샤의 실종 이후 마녀 집단의 정체를 파헤치려 고군분투했던 인물로, 2차 대전 때 실종된 아내 앙케(제시카 하퍼)에 대한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서글픈 전쟁 세대이기도 하다. 수지는 그런 박사의 뺨을 감싸며 속삭인다. “우린 죄책감이 필요해, 닥터. 수치심도. 하지만 당신과는 상관없어.” 박사는 아내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진실을 듣는 것과 동시에 아내를 포함해 자신과 관련된 모든 여성을 망각하는 ‘선물’을 받는다. 물론 이를 과연 선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조치는 여성들의 사적 경험을 해석하고 승인해온 상징계의 남성 주체로부터 권위를 거두어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각 또한 안식이라 볼 수 있다면, 클렘페러 박사에 대한 수지의 마더링은 결코 닿지 못할 미지의 영역을 애처로이 맴도는 한 인간에 대한 구원이면서 나치의 피해자에게 보내는 위무(慰撫)의 손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그, 턱 끝까지 차오르는 무게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므로.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마더링은 단순한 돌봄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괴와 창조의 이중 박동이자, 죽음을 통해 착취의 고리를 끊고 해방을 허락하는 자비이며, 세계를 자기 질서에 맞추어 새롭게 조형하는 폭력이다. “어머니는 그 누구의 자리도 대신할 수 있으나 그녀의 자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2018년작 〈서스페리아〉가 보여주는 마더링은 무해한 소녀들에 대한 여성괴물의 착취 서사가 아니라 모성을 둘러싼 현대적 상상력의 시험대다. 돌봄과 폭력, 자비와 파괴를 동시에 품고 귀환한 원초적 어머니는 가부장제가 정의해온 여성 괴물과는 전혀 다른 윤곽의 모성을 그려 보인다. 어머니란, 혹은 마더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눈에 여전히 괴물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의 문턱을 스치는 불가해한 권능인가?

어머니의 자리는 내부의 경계에 있다. 쉬이 도달할 수 없는 곳. 우리는 다만 발걸음 소리를 세며 그녀를 기다린다. 65, 64, 63…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 영화
영화 <서스페리아> (2018) 스틸컷 / 사진출처. 다음 영화
이태인 영화 칼럼니스트

[영화 <서스페리아> (2018) - Official Trailer | Amazon Stud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