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할아버지 댁에 가면 다락방이 있었다. 지방 도시의 오래된 주택이었는데 다락방의 작은 문을 열고 가파른 나무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 백열전구를 딸깍, 켜면 손바닥만 한 공간이 환해졌다. 쿰쿰한 냄새가 나고 먼지가 피어올랐지만,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쌓여있는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빛바랜 옛날 책이나 사진첩을 꺼내 보고 오래된 물건들을 뒤적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친척들이 모여 시끌벅적한 바깥과는 달리 다락방은 비밀 공간처럼 숨어있기 좋았고 왠지 모를 아늑함이 느껴져 잠이 솔솔 오기도 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다락방에 대한 로망이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 속에서 분주하게 보내는 일상에서 벗어나 작지만 혼자만의 공간에서 숨어있듯 지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 이야기하려는 공연장이 바로 그런 다락방 같은 곳이다.
인춘아트홀 / 사진출처. 예술의전당 홈페이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클래식 공연장, 서울 예술의전당으로 가보자. 예술의전당에 음악회를 보러 간다고 하면 보통은 콘서트홀이나 IBK기업은행챔버홀(이하 챔버홀)을 떠올릴 것이다. 대규모 관현악 공연이나 스타급 연주자의 리사이틀이 열리는 콘서트홀과 다양한 실내악 공연을 비롯한 리사이틀이 열리는 챔버홀은 음악당 1층에 있어 항상 많은 관객으로 붐빈다. 콘서트홀은 2,505석으로 국내 클래식 공연장 가운데 최대 규모이고 챔버홀은 600석으로 중견급이라 할 만 하다. 그런 예술의전당에도 내가 아끼는 작은 공연장이 있으니 바로 ‘인춘아트홀’이다.
음악당에서 계단을 따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인춘아트홀이 말 그대로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인춘아트홀’이라고 쓰인 현판도 작고 티켓 부스도 작고 입구도 작아서 마치 다락방 같다. 콘서트홀에 왔다가 화장실을 찾아 내려오거나 잠시 앉아 기다릴 벤치를 찾아 내려온 관객들이 ‘어머, 여기에도 공연장이 있어?’라며 놀라는 목소리도 종종 들린다.
인춘아트홀 입구 / 사진. ⓒ권혜린
인춘아트홀 안으로 들어가면 홀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00석 규모의 객석은 무대와 단차가 크지 않아 어디에 앉아도 연주자의 모습을 생생히 보며 함께 호흡할 수 있다. 특히 층고가 낮은 구조는 다락방 같은 편안함과 아늑함을 준다. 하지만 벽과 천장의 마감재나 의자의 색깔이 다른 홀보다 채도가 낮아서 규모는 작아도 분위기는 오히려 무게감이 있고 세련된 공간이기도 하다.
인춘아트홀 / 사진출처. 예술의전당 홈페이지
내가 인춘아트홀을 처음 찾은 건 2023년이었다. ‘예술의전당이 선정한 젊은 클래식 스타들의 무대!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빛나는 내일’이라는 콘셉트로 마련된 예술의전당의 기획 프로젝트 ‘THE NEXT’ 무대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연간 시리즈로 이어진 젊은 음악가 10명의 무대 가운데 피아니스트 3명의 연주를 들으러 갔었다.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연주자들은 서로 개성도 레퍼토리도 달랐지만, 자신이 만들어가는 음악에 대한 확신, 연주에서 묻어나는 뜨거운 에너지는 하나같이 대단했다.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의 집중력도 컸고, 연주자의 숨소리 하나하나까지 음악처럼 들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나는 이 연주자들의 무대를 다른 공연장에서 이미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춘아트홀이라는 공간에서 만난 이들의 무대는 왠지 ‘100명에게만 주어지는 예술의전당의 특별한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마음 맞는 사람끼리 작은 다락방에 모여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은밀한(!) 재미가 있었다고나 할까? 실제로 어느 날엔가는 같은 시간에 콘서트홀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열려 음악당 로비가 엄청나게 붐비고 시끌벅적했는데, 인춘아트홀에서는 우리끼리의 은밀한 파티가 열리고 있던 것이다!
예술의전당에서는 ‘인춘아트홀 Special’이라는 이름으로 기획 공연을 꾸준히 마련하고 있다. 지난해 THE NEXT에서는 ‘차세대 클래식 거장의 현재를 마주하다’라는 주제로 기타리스트 조대연, 테너 손지훈, 피아니스트 김정환, 플루티스트 김예성, 비올리스트 이해수의 무대가 열렸고, 안종도, 이시내, 김규연, 김희재 등 국내 클래식 음악계를 이끄는 중견 피아니스트들의 무대인 ‘The Masters’도 있었다. 2023년에는 한 작곡가의 작품을 여러 연주자가 선보이는 Beethoven Series, Rachmaninoff Series도 열려 의미 있는 무대를 선보였다.
2023년 인춘아트홀 Special 공연에서 받은 굿즈 / 사진. ⓒ권혜린
올해도 ‘세계 무대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신예 연주자들을 국내 관객에게 가장 먼저 소개한다’는 콘셉트로 THE NEXT 시리즈가 시작돼 4명의 연주자를 인춘아트홀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 6월에 그 첫 번째 주자인 피아니스트 이정우의 리사이틀이 열려 반가운 마음으로 다녀왔다. 열일곱 살, 앳된 얼굴의 연주자는 무대에 나와 인사하는 것마저 아직은 어색할 정도로 풋풋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미 국제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만큼 모차르트와 드뷔시, 슈만과 쇼팽에 이르는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덤덤하면서도 자신 있게 펼쳐내 보였다.
지난 6월 21일 인춘아트홀에서 열린 이정우 피아니스트의 공연 / 사진. ⓒ권혜린
이정우에 이어 8월에는 더블베이시스트 유시헌, 11월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과 임도경의 무대가 열리는데 모두 ‘지금 더 많이 만나둬야 할 샛별’이 분명하다. 이들의 무대를 콘서트홀이나 챔버홀에서도 만날 기회가 있겠지만 인춘아트홀이라는 공간에서 만난다면 조금은 더 특별할지도 모른다.
칼럼을 쓰며 자료를 찾다가 재미 삼아 챗GPT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다락방은 어떤 공간이야?’라는 질문에 ‘다락방은 일반적으로 집의 가장 위층, 지붕 아래에 위치한 작은 공간’이라며 다락방의 용도와 기능, 다락방이 주는 느낌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줬다. 그러면서 나에게 ‘다락방을 만들고 싶어?’라고 되묻는다. 그래서 내가 ‘그건 아니야. 난 작은 공연장을 좋아하는데 다락방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이라고 했더니 ‘아, 그렇구나. 작은 공연장이 다락방처럼 느껴진다는 말- 참 멋진 표현이야. 무대와 객석 사이가 가깝고 공간이 좁아서 사람들 숨소리나 눈빛까지 하나하나 느껴지는 곳 말이지? 그런 공연장은 정말 다락방처럼 아늑하고 속삭이듯 전달되는 진심이 더 크게 울리는 곳이야. 다락방은 감춰진 공간이지만 거기에서만 가능한 어떤 솔직함이나 친밀함이 있잖아’라는 똑소리 나는 답변을 내놨다.
‘아늑하고 속삭이듯 전달되는 진심이 울리는’ 인춘아트홀을, 예술의전당이 다양하게 활용해 더 많은 기획 공연을 선보이길 기대한다.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엉뚱한 상상을 하며 꿈을 꾸었던 것처럼 인춘아트홀에서라면 음악가들의 새로운 시도가 담긴 신선한 기획 공연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인춘아트홀 / 사진출처. 예술의전당 홈페이지
멋진 연주자와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다락방 감성이 한 스푼 더해진 이 작은 공연장에서 예술의전당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을 느껴보시기를 바란다. ‘이곳에서만 가능한 솔직함과 친밀함’이 분명 좋은 기억을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