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도 사회적 공감 전제돼야
‘물’이라는 자원 하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변화에 가장 민첩하게 대응해 제품 혁신을 넘어 경영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기업이 여럿 있다. 프록터&갬블(P&G)도 그중 하나다. 세계 최대 생활용품 기업인 P&G는 찬물 세탁 세제, 고농축 세제 등을 앞세워 ‘불편하지 않은 친환경’이라는 새 기준을 시장에 제시했다. 물 사용량은 줄이고, 세척력은 높이며, 탄소 배출은 낮췄다. 익숙한 소비자 경험을 그대로 유지하며 지속가능성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기술과 시장, 환경과 소비자의 접점을 정확히 짚어낸 사례로 꼽힌다. 유니레버도 마찬가지다. 물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드라이 샴푸, 헹굼이 적은 위생용품은 단지 새로운 편리만을 만들어낸 신제품이 아니다.
깊게 또 멀리 보는 정책 설계 절실
하지만 기업 혁신이 확산하는 데 기존 인식과 제도가 발목을 잡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제품이라도 소비자가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면 외면받기 십상이다. ‘작은 용량에 왜 가격은 같냐’는 반응은 단순히 가격에 대한 불만이 아니다. 정책이 소비자 행동을 이끌지 못하고, 정부가 기업의 혁신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찬물 세제를 장려하고, 물 사용을 줄이는 기술에 세금 혜택을 주는 등 정부가 실질적 인센티브를 제공했다면 어땠을까? 소비자 인식은 달라졌을 것이고 시장의 변화는 훨씬 빨라졌을 것이다. 지금처럼 제도가 기업보다 느리고, 정책이 현실보다 멀다면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빛을 보지 못한다.지금 필요한 것은 ‘듣는 정부’다. 시장은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다. 혁신에 족쇄를 채우는 규제 대신, 혁신의 촉매가 되는 정책을 마련하고 시행해야 한다. 제도는 혁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혁신과 함께 설계돼야 한다.
기업도 정책 제안 게을리하지 말아야
기업도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시장 전략뿐만 아니라 ‘비시장 경영 전략’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단순한 대관 활동이 아니라 상품과 서비스 개발 단계에서부터 선제적으로 정책을 설계해 제안하고, 정부와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혁신 제품을 개발하면서 혁신이 사회에 파급되도록 제도 개선을 이뤄내는 과정은 설득이 아니라 증명의 영역이다. 이를 위해 회사 구성원은 물론이고 정부 및 사회와도 전략적으로 소통해야 한다.전문가와 함께 실증 조사를 벌여 객관적인 자료를 제공하거나, 다른 나라 제도와의 비교 연구 등을 제시하면서 설득력 있는 근거 기반의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근거를 제시하는 활동뿐만 아니라 관련 시민단체와의 협업 등을 통한 캠페인 등 사회적 공감대를 높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업은 정부 관계자, 시민단체, 언론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우려를 경청하고,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하며 관련 정책이 입안될 수 있도록 지지 그룹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책은 더 이상 일방적 통보가 아니다. 기후 위기, 기술의 진보 등은 정부와 기업이 파트너로 같이 대응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한다. 정부와 기업이 공동 설계자로 협력해야 하는 시대다. 혁신과 정책은 줄탁동기 해야 한다. 안에서 병아리가 껍데기를 쪼고, 밖에서 어미가 동시에 응답할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나온다. 지금 큰 시각으로 ‘함께 두드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