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파울루의 REAG 벨라스 아르테스 극장에서
<서울의 봄>, <밀정>, <영웅> 등
22편의 작품이 관객들과 만났다.
일부 작품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아...
비트 세대 작가 윌리엄 S. 버로스가 브라질 한국영화제에 왔다면, 어차피 코끼리 엉덩이 만지기다. 나는 장님이고 브라질 상파울루는 내겐 코끼리이다. 지난해에도 왔다 갔었다 한들, 그리고 올해는 열흘 가까이 체류하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한들... 더듬더듬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는 주제에 '아 코끼리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는 얕은 지식과 인식만을 가질 것이다. 38년을 살아온 허 박사라는 이름(가명이겠지)의 투어가이드가 공항에서 픽업을 나와 "여긴 지금 한겨울이에요"라고 말했을 때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그날 밤 영상 9도의 날씨에, 호텔에서 벌벌 떨면서 몇 번을 깼는지 모를 정도이다. 9도는 9도이되 내가 아는 9도가 아니었다.
상파울루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고작 파울리스타 대로일 것이다. 우리의 세종로? 상파울루를 생각하면서 자다가 꿈을 꾼다면 파울리스타 거리만 나올 것이다. 영화제 메인 공간이었던 예술영화 전용관 'REAG 벨라스 아르테스 극장' 건너편의 리비에라 바(Riviera Bar)에는 게이들이 그득했던 것, 두 남자가 서로의 얼굴을 부비며 밀어를 속삭이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는 것(오히려 예뻤다) 등만 생각날 것이다. 바 입구의 체크어는 트랜스젠더였고, 그(녀)가 내 이름을 웨이팅리스트에 올려놓을 때 만약 라이언 쿠글러의 <씨너스 : 죄인들>에 나오는 '떡대' 콘브레드(오마 벤슨 밀러)가 여장남자였다면, 그건 좀 끔찍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는 한국 총영사관이 있고 한국문화원이 있다. 한국대사관은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 있다. 거기엔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있다. 브라질리아에는 정치와 행정이 있다. 상권과 문화의 중심지는 상파울루이다. 다른 곳이 아니라 상파울루에서 한국영화제가 열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올해 14번째로 열리는 행사지만 한국에 이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영화제가 스스로 잘해서이기도 했지만, 브라질에서의 심상치 않은 한류 붐, 특히 상파울루에서의 K-컬쳐 열기가 도와준 측면도 있다. 모두 엄청나게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를 본다. 모두 어마어마하게 한국의 노래를 좋아한다. 모두 꽤나 한국 소설과 문학을 읽는다. 상파울루에는 유창한 한국말을 하는 브라질리언 여성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노래로 한국말을 배우고 드라마와 영화로 배우기 시작한 젊은 여자들이다.
‘제14회 브라질 한국 영화제’가 열린 상파울루의 헤아그 벨라스 아르치스 영화관 / 사진=필자 제공
올해에는 22편의 영화를 가지고 갔다. 광복 80주년이라 5편 정도는 이전의 해방투쟁 영화들을 섞었다. <밀정>이 있었고 <암살>, <봉오동 전투>, <영웅> 등이 있었다. <서울의 봄> 상영은 처음엔 생각하지 못했다. 계엄이 있었고, 만약 이걸 상영한다면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브라질에 계속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영화제를 준비하는 사이에 정부가 바뀌었고, 그렇다면... 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가지고 왔다. 이제야 <서울의 봄>을 본(상파울루에서 개봉이 됐다. 넷플릭스로 본 사람들도 있다. 이는 만석을 채우지 못한 이유이다) 관객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어둡고 우울했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1980년 이후 한국인의 삶이 어땠는지를 물어봤다. 이런 영화는 대체로 영화적으로 고관여층이 찾아서 본다. 다들 한국의 정치 상황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이심전심 같았다. 그다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작들도 갖고 갔다. <소방관> <대도시의 사랑법> <장손> <딸에 대하여> 등등이다. 특히 폐막작인 <폭로 : 눈을 감은 아이>는 국내 미개봉작이다. 아직 배급이 결정되지 않았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됐고, 이후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탔다.
19일 폐막작으로 상영될 터이지만(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18일이다.) <폭로 : 눈을 감은 아이>는 현지 시각 16일 오후 2시, 상파울루에 있는 벨라스 아르테스 예술대학의 ESPM(광고홍보마케팅학과)의 극장에서 한 차례 상영됐다.
내가 보기에 <폭로 : 눈을 감은 아이>는 세 가지 좋은 장면이 있고, 세 가지 정도의 아쉬운 장면이 있다. 예컨대 진실은 침묵과 폭로 사이에 있다는 식의 컨셉, 주제, 영화가 얘기하려는 인생의 상대성이론 같은 것, 기이한 모호함이 좋다. 주인공 인선(김민하)은 친구이자 형사인 민주(최희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실을 알면 힘들어져." 그런 대사, 그런 아우라가 좋은 작품이다. 아쉬운 점은? 그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ESPM에서 상영할 때 브라질 젊은 관객들이 어느 쪽에 치중해서 볼 것인가가 자못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상영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다. 5.1로 녹음된 DCP였는데 돌비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극장이었다.
[영화 <폭로: 눈을 감은 아이> 예고편]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관객들은 투 썸즈 업을 했다. 다들 따봉이라고 외쳤다. 영화는 여성 서사가 뚜렷하고 범죄의 대상으로만 묘사해 온 피해자를 주체로 전도시키는 전복의 캐릭터라이징이 좋았는데 그걸 눈 밝은 대학생 관객들이 하나같이 알아본 셈이다. 어떤 여대생은 영화 후반 40분을 울면서 봤다고 했다. 무대 중앙에 앉아 있는 전선영 감독과 GV를 하면서 흘깃 쳐다보니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영화 시작 전 다소 긴장했다. 혹시나 관객들 반응이 안 좋으면 어쩌나 해서. 그러나 정작 나는 관객들 반응이 너무 좋아서 걱정됐다. 영화제 관객 반응을 두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시쳇말로 '뽕을 맞았다'고 말한다. 영화제 반응과 개봉 후 일반 관객의 반응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 점이 우려스러웠다.
영화 <폭로 : 눈을 감은 아이>의 영화 감독, 전선영 감독 / 사진=필자 제공
개막작 <밀정>의 감독인 김지운의 전작 <거미집>이 마침 상파울루 일반 극장에서 개봉이 되기도 했다. 그는 <거미집> 홍보차, 그리고 한국영화제 개막작 감독으로서 왔다. 양손에 떡을 쥐었다. 김지운은 그다지 말이 없고 스위트한 캐릭터가 아니다. 다소 뚱한 표정의, 고독한 늑대 같은 성격이다. 원래는 그가 있는 동안 <커피와 시가렛> 같은 분위기로 인터뷰를 하려 했지만, 그것도 잘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몸이 아팠다. 아픈 상태에서 24시간 비행으로 왔으니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유가 변변하지 않았다.
개막작 <밀정>의 감독 김지운 / 사진=필자 제공
그냥저냥 차로 타고 같이 이동하다가, 리우데자네이루에 각각 행사하러 가면서(김지운은 <거미집> GV, 나는 리우데자네이루 영화인과의 대담) 간헐적으로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아직도 거기 살아?" "아냐 거기서 나왔어. 20년 살았는데. 지금도 근처이긴 한데 또 이사 가야 해." "혼자서 뭐 해 먹어?" "안 해 먹어. 나가서 사 먹어, 늘" "매 끼니를?" "그래서 난 영화를 하는 것 같아.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이번 영화 <더 홀> 잘 나왔어?" "아직 편집 중이야. 거의 다 했어." "정호연은 영어를 잘하고. 염혜란은?" "배우긴 배우야. 원래는 못했는데 크랭크 인 전에 악착같이 배웠더라구. 잘했어, 아주."
<더 홀>은 편혜영의 소설 <홀>이 원작이다. 편혜영은 상파울루 독자들과 화상 토크를 했다. 우연이 많이 겹쳤다. <더 홀>에 테오 제임스가 나오는 것은 순전히 할리우드 자본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테오 제임스는 <언더월드4>에 나왔고, 개인적으로는 쉐일린 우들리와 나왔던 <다이버전트>에서가 좋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젠틀맨> 때문에 많이 알려졌다. <더 홀>로 국내 인지도가 많이 올라갈 것이다. 김지운과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중구난방 이어졌다.
"<거미집> 참 좋았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당신 영화는 대체로 흥행이 안 되더라구. <라스트 스탠딩>이 그랬고." "<라스트 스탠드>!!" "아 맞아. 그 영화 완전히 <하이 눈>이었는데." "그랬지." (나는 <인랑>도 좋아했었어. 근데 그것도 망했지.)
개막작 <밀정>의 감독 김지운 / 사진=필자 제공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김지운과 방문한 세리엘라 프로덕션(Seriella Production)은 인상적이었다. 10만 평 부지에 오픈 세트장을 만들어 놨다. 지금은 <파울루>라는 146부작 드라마를 제작 중이다. 우리의 KBS 대하 사극 같은 것이다. 고 신봉승 작가의 드라마 <조선왕조 5백 년>을 생각하면 된다. 브라질은 우리의 1990년대처럼 자국의 드라마가 강세이다. 반면, 자국 영화시장 점유율은 10%를 밑돈다. 브라질 영화계가 한국을 부러워하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도 문제가 많다. 브라질 남부 히우그란지두술주 상레오폴두시에 있는 우니시노스 대학 영상제작학과의 조스마르(Josmar) 교수 같은 이는 그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만난 영화인들 상당수는 과거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를 궁금해했다. 브라질 영화계의 요즘 화두는 스크린쿼터와 저작권법이다. 흥미로웠다.
<파울루>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이다. 세리엘라 세트장은 아예 예루살렘의 성 내, 왕의 숙소, 당시의 저잣거리를 지어 놓고 365일 이 드라마를 찍는 중이다. 인공 호수까지 있다. 이런 정도의 규모는 캐나다 토론토의 세트장밖에 없다. 차이라 하면 토론토는 10만 평급 부지에 초대형 실내세트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동차를 달리게 하고 비행기가 격납고에서 나오는 장면들을 찍게끔 해놨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에비에이터>를 그런 데서 찍었다. 토론토 실내세트장의 규모를 카메라에 담으려면 경비행기나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부감 샷으로 찍어야 한다. 리우의 세리엘라도 그 급이었다.
이곳의 책임 매니저인 구스타보는 김지운 같은 한국 영화감독을 유치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한국 영화가 이곳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나 쿠바의 아바나 해안 말레꼰에서 로케이션을 하려면 물류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최소한 체류 비용이라도 리쿱 받지 못하면 24시간 거리의 이곳에서 로케이션을 감행할 이유가 없다. 이건 각 단위 사업자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이재명 정부와 룰라 다 시우바 정부, 정부 기관 대 정부 기관의 협약이 전제돼야 한다. 한국과 브라질이 영화와 드라마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는 선결 조건들이 필요하다. 그래도 브라질 이민 60년사 드라마 같은 건 좋을 것이다. 1963년 첫 이민이 시작됐다. 대부분 포목상이었다. 상파울루 코리아타운엔 초기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살아간다.
브라질 영화의 대표선수는 월터 살레스(바우테르 살리스)이다. 우리에게 <중앙역>과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할리우드에서 <다크 워터> <온 더 로드> 같은 작품을 찍기도 했다. 이번에 <계엄령의 기억>으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탔다. <계엄령의 기억>의 원제는 <아임 스틸 히어, I'm still here>이다. 1970년대 브라질이 군부 통치에 신음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브라질과 우리의 동질감이 비슷한 것은 같은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동질감은 먹는 음식 탓이기도 한데 소고기 맛이 비슷하고 그걸 콩 베이스의 국물에 찍어 먹거나 뿌려 먹거나 심지어 말아 먹는 것까지 흡사하다. (아 얘기가 진정으로 컷 업 기법으로 간다) 삐멩따 고추기름은 음식점마다 약간씩 상이하지만 센 청양고추 맛이어서 극히 조심해야 하며 옥수를 갈아서 막대 모양으로 튀긴 뽈렝따는 우리의 옥수수튀김과 같은 맛이다. 음식이 비슷하면 엄마 손맛이 비슷하다는 얘기이며 마음 씀씀이가 같고 민족성이 같다는 얘기이다.
브라질 영화 감독 월터 살레스(바우테르 살리스)
[영화 <계엄령의 기억> (I'M STILL HERE) | 공식 예고편 (2025)]
이야기를 삼천포에서 다시 돌려서 월터 살레스는 엄청난 부자의 아들이다. 금융자본가 집안이다. 그는 영화를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에고와 자신의 자유주의적 이념을 위해서 만든다. 룰라가 재집권하기 전 보우소나루가 브라질 사회를 옥죌 때 그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월터 살레스이다. 한국과 브라질 영화계가 손을 잡는, 가장 쉬운 방법은 월터 살레스가 한국 영화에 투자하는 것이다. 아직은 언감생심이겠으나. 월터 살레스의 형제는 금융자본가로 파울리스타 거리의 IMS(잉스치뚜뚜 모레이라 살리스)가 그의 것이다. 도서관, 극장, 카페, 북샵 등이 모여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한국이 좋아하는 브라질 감독으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도 있다. 그의 <시티 오브 갓>은 파격이었다. 주제 사라마구 원작을 영화로 만든 <눈먼 자들의 도시>도 좋았다. <아빠의 화장실>은 기억하는 사람은 적지만 아주 따뜻한 가족 드라마였다. 실직한 아빠가 고속도로에서 이동 화장실 장사를 한다는 얘기다. 메이렐레스는 특이한 필모를 지녔다. <두 교황>을 찍었다. 박찬욱 감독이 쇼 러너 감독을 했던 <동조자>의 4부를 마치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메이킹처럼 찍었다. 애플TV의 8부작 드라마 <슈거>는 마치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를 연상케 하는 주인공 캐릭터를 내세웠다.
2025년 6월 12일부터 19일까지, 제14회 브라질 한국영화제를 개최했다. / 사진=필자 제공
시즌 드라마 <블랙 미러>의 상당수 로케이션이 상파울루였다는 것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뛰어난 문필가 안나 킴에게서 들은 얘기이다. “그 드라마 다시 잘 봐 보세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안나 킴은 미술 건축에 조예가 깊다. 상파울루는 미술의 도시이고 브라질리아는 건축의 도시라고 했다. 미술과 건축이 발달한 곳은 카메라를 들이댈 데가 많다. 상파울루 벽화의 거리를 다녀온 감독 전선영은 이곳에서 당분간 머무르면서 영화를 찍을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해변 도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있다. 전선영은 사주에 물이 많고 그래서 수영을 좋아하며 그래서 리우에서 아침 수영을 하다가 감기에 걸렸다.
어쨌든 브라질은 영화적으로 심도가 깊은 곳이다. 북미와 유럽, 서구에 대해서라면 우리가 짝사랑은 할 만큼은 다 해왔다. 이제는 남미이다. 브라질이다. 월터 살레스의 영화 자본을 한국에 끌어 와야 한다. 문화는 생존이며 영화와 드라마는 먹거리이다. 모든 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다. 다만, 폼을 좀 내면서 할 일이다. 브라질의 윌리엄 S. 버로스는 이제 귀국행 비행기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