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에서 관람객 앞에 첫 선을 보이는 보랏빛 집합 시리즈. 
Kwang Young Chun, Aggregation 25-AP029, 2025,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17 x 91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 앞에 첫 선을 보이는 보랏빛 집합 시리즈. Kwang Young Chun, Aggregation 25-AP029, 2025,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17 x 91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포장법이 있다. 누군가에게 줄 물건을 널찍한 보자기로 감싸 건네는 것이다. 직육면체 상자에 넣는 단순한 방식과 달리 한겹 한겹 물건을 쌀 때마다 받는 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 담긴다.

한국인의 정이 깃든 이 보자기 문화에서 작가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은 이가 있다. 전광영 작가다. 그는 한국적 재료와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해 왔다. 작가는 미술학도 시절부터 한국인으로서의 뿌리와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작업을 갈구해왔다. 1970년 미국 필라델피아 예술대학에서 유학하며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당시를 회상하면 마음 한편엔 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이질감이 남았다고 작가는 전하곤 한다.
Installation views of Kwang Young Chun’s Time Blossom at Perrotin Seoul. Photo: Choi Chul L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Installation views of Kwang Young Chun’s Time Blossom at Perrotin Seoul. Photo: Choi Chul L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그러다 어린 시절 어렴풋한 기억과 마주한 작가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한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작은 아버지가 약재를 한지로 정성스레 감싸던 장면이 작가를 화폭 앞으로 이끌었다. 이 기억은 작가가 국제 미술계에서 독창적 목소리를 가진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해 준 ‘집합(Aggregation)’ 시리즈 탄생에 중요한 구심점이 됐다.

전광영 작가의 신작을 소개하는 전시 ‘타임 블러섬(Time Blossom)’이 서울 강남구 페로탕에서 진행되고 있다. 회고전 성격이 강했던 지난 전시와 달리, 2023년부터 올해까지 작업한 최신 작품 위주로 작가의 긴 화업을 압축해 선보인다.
수백 개의 삼각형을 화면에 배치해 입체감과 함께 강렬한 에너지를 드러내는 집합 시리즈. 
Installation views of Kwang Young Chun’s Time Blossom at Perrotin Seoul. Photo: Choi Chul L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수백 개의 삼각형을 화면에 배치해 입체감과 함께 강렬한 에너지를 드러내는 집합 시리즈. Installation views of Kwang Young Chun’s Time Blossom at Perrotin Seoul. Photo: Choi Chul L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작품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마치 빌딩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도시의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한다. /강은영 기자
작품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마치 빌딩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도시의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한다. /강은영 기자
작품 제작 과정이 곧 명상이자 수련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곧 수행의 연속이다. ‘집합’ 시리즈는 논어나 맹자 등 짧게는 몇 십 년부터 길게는 백 년의 세월을 거친 오래된 문서를 활용한다. 오래된 종이로 감싼 무수히 많은 삼각형의 조각들이 작품을 완성한다. 전국 각지에서 고서를 구하는 일부터 시작해, 스티로폼을 잘라 각기 다른 크기의 삼각형을 만들고 각 조각의 크기에 맞춰 고서를 자른 후 조각을 감싸는 과정, 조각들을 하나하나 화면에 배치해 나가는 작업까지, 단번에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Kwang Young Chun, Aggregation 25-AP033, 2025,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17 x 91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Kwang Young Chun, Aggregation 25-AP033, 2025,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17 x 91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작가는 이 과정을 “우리 조상의 애환과 혼을 수천, 수만 번 감싸는 행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접합 시리즈의 조각을 들여다보면 고서로 정성스럽게 감싼 조각들이 투박한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 이 끈 또한 고서를 한 장 한 장 꼬아 만든 것이라 하니 얼마나 많은 정성과 시간이 서려 있는지 알 수 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들어가는 조각만 해도 작품 크기에 따라 수천개에서 수만개에 이른다. 작가는 붓 대신 손으로 시간을 쌓아가며, 마치 수련하듯 한 점 한 점 조각을 더해간다. 그 속엔 시간과 기억, 그리고 한국적 정서가 차곡차곡 스민다.

작가의 감정처럼 피어난 색

페로탕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색(色)이 있다. 그간 전광영하면 떠오르던 모노톤의 작품이 아닌, 빨강, 파랑, 초록 등 강렬한 색채감이 드러나는 작품들이 만개한 꽃처럼 활짝 핀 채 관람객을 반긴다.

작가는 색을 내는 데도 우리 전통을 활용했다. 한복에 쪽물을 들이듯 치자나 구기자, 오미자, 감물, 쑥, 홍화, 울금, 석류 껍질, 연지 등 자연에서 채취한 천염 염료로 염색했다. 특히 인디고와 홍화로 빛깔을 낸 보라빛의 집합 시리즈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관람객과 마주한다.
최초 공개되는 전광영 작가의 '품' 시리즈. 
Kwang Young Chun, Aggregation 24-NV151, 2024,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31 x 163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최초 공개되는 전광영 작가의 '품' 시리즈. Kwang Young Chun, Aggregation 24-NV151, 2024,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31 x 163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작가의 시그니처 시리즈 '집합'과 달리 입체적 밀도를 잠시 내려놓고 평면 위에 부드러운 구조를 선보였다. Installation views of Kwang Young Chun’s Time Blossom at Perrotin Seoul. Photo: Choi Chul L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작가의 시그니처 시리즈 '집합'과 달리 입체적 밀도를 잠시 내려놓고 평면 위에 부드러운 구조를 선보였다. Installation views of Kwang Young Chun’s Time Blossom at Perrotin Seoul. Photo: Choi Chul Li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전시장 2층의 '품' 시리즈도 최초 공개된다. 이 시리즈는 입체적인 집합 시리즈와 달리 평면 위에 정제된 표현이 특징이다. 유기적 리듬과 부드러운 구조로 완성된 화면은 마치 고요한 바다 혹은 하늘을 보는 듯하다. 페로탕 서울의 박혜미 홍보 담당은 “그간 작가가 선보인 입체 작품들은 삼각형의 조각들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강렬한 에너지가 특징이었다면, 감싸안는다는 의미의 ‘품’ 시리즈는 조각 개개의 물성보다는 작품을 통해 느껴지는 차분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통해 깊은 정서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마음”이라고 소개했다.
Kwang Young Chun,Aggregation 25-AP031, 2025,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17 x 91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Kwang Young Chun,Aggregation 25-AP031, 2025,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17 x 91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이 컬러풀한 작품들에는 작가의 개인적 감정이 녹아 있다. 그는 오랜 시간 투쟁적으로 예술 활동을 지속해 왔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자신만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 헤맸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유학파라는 이유로 화단에서 배척되기도 했다.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 온 작가는 이제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을 상징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커리어 후반기에 접어든 지금, 작가는 어떤 전환기를 맞이한 듯하다. 박혜미 홍보 담당은 “최근 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작가님께 큰 기쁨이 되고 있다”며 “손녀의 그림에서 받은 영감이 화사한 색채로 되살아나 작품 속에 녹아들고 있다”고 전했다.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