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면 건축가" 비아냥 듣던 해체주의 건축가
1993년 '비트라 캠퍼스 소방서' 첫 완공작
60년대 일본 '우산집', 50년대 장 프루베 주유소
사라져가는 건축 유산 복원해 캠퍼스로
1993년 '노출 콘크리트' 건축의 선구자였던 안도 타다오가 일본 밖에서 첫번째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독일 비트라 캠퍼스 안에서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의 비트라 캠퍼스는 가구 브랜드 비트라의 본사와 공장 그리고 뮤지엄이 한데 있는 공간이다.
비트라 캠퍼스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유작으로 남긴 여성 건축가 최초의 프리츠커상 수상자, 자하 하디드(1950-2016)의 소방서였다. 불에 탄 공장을 재건한 뒤 화재 예방에 힘 쏟던 비트라는 1990년 무렵 자체 소방서를 짓기로 한다. 이때 선택한 건축가가 자하 하디드다.
'도면 건축가' 놀림 받던 자하 하디드의 첫 건물
자하 하디드의 도면을 현실에 옮긴다는 건 그 자체로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으로 영국 AA에서 렘 쿨하스를 사사한 하디드는 이때까지만 해도 '건축물 없는 건축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설계도로 공모전마다 크게 인정 받았지만, 이를 실제 건물로 실현시킬 건축주는 아무도 없었다.
중력에 떠있는 듯한 지지대들, 사선과 사면으로 구성돼 얼어붙은 콘크리트 같은 날카로운 외관, 실내에선 어떤 공간에서도-심지어 바닥면에서도-수평이나 수직을 찾아볼 수 없는 과감한 건물. 주변엔 수평으로 거대한 공장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 비정형의 건축물이 더 돋보인다. 선명한 가장자리와 모서리들은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길 반복해 한참을 봐도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건축 미학이 만든 공장의 신세계
비트라 건축 투어의 핵심은 산업 건축에 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업용·주거용 건축물이 아닌 혁신적인 첨단 공장 건축의 끝을 볼 수 있어서다. 영국의 하이테크 건축가 니콜라스 그림쇼(84)는 비트라 공장 화재 직후인 1981년과 1983년 두 개의 공장을 지었다. 그는 가장 값싼 대량생산 소재로, 가장 빠르고 튼튼하게 공장을 건축하기로 이름난 장인. 수평의 견고한 공장은 당시 6개월마다 하나씩 완공돼 화재 후 1년 만에 공장을 다시 가동할 수 있게 했다.
작지만 소중한 건축 유산들의 안식처
비트라 캠퍼스의 건축물 중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인류의 유산으로 남을 만한 것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렌조 피아노(86)는 6㎡의 공간 안에 모든 기능이 들어있는 초소형 생활 주택 디오게네(2013)를 남겼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 디 시노페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인데, 세속적인 사치품을 혐오한 그는 통 속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생 정원 속에 초소형 초가집
요즘의 비트라 캠퍼스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축으로 여전히 진화 중이다. 비트라 하우스 뒷편, 4000㎡에 달하는 '우돌프 정원'은 네덜란드 정원 디자이너 피에트 우돌프가 2020년부터 꾸미고 있다. 뉴욕 하이라인, 런던 서펜타인갤러리,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션 등 전 세계 공공 정원 디자인을 맡은 정원사는 3만여 종에 달하는 야생의 식물들을 균형있게 조화시켜 1년 내내 신비로운 정원을 가꿔가고 있다.
바일 암라인(독일)=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