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 '문화비축기지'
1970년대 석유파동 때 설치된 탱크들
숨어있다가 2000년대 후 모습 드러내
세월 머금은 철판·건물에 식물 돋아나
모호해진 경계 속에 한 자연처럼 보여
과거 기억 품은 문화비축기지 걸으면
숨어 있던 시간이 쏟아져 내리는 기분
2017년 ‘문화비축기지’로 개관한 이 공간은 본래 ‘마포석유비축기지’였다.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석유저장 탱크 5기가 이곳에 설치됐다. 지름 15~38m, 높이 13~15m인 이 대형 탱크들에는 6907만L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었다. 1급 보안시설이라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채 산속에서 숲으로 가려져 있던 장소. 그 덕에 외부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오래 숨어있을 수 있었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신축을 계기로 2000년에 폐쇄됐고, 이후 유휴지로 남아 있다가 2017년 석유 대신 문화를 비축하는 문화비축기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탱크를 둘러싸던 방유제까지 보존해 석유비축기지 원형을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곳의 석유 탱크들은 다양한 재생 방식을 보여준다.
이곳은 탱크가 철거된 자리일지라도 과거의 탱크가 인지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새로운 것을 더할 때는 과거의 것과 확실하게 구분되지만 주변과 잘 어우러지는 재료를 선택해 홀로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탱크를 그대로 보존해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T4와 같은 곳에서는 철판으로 구성된 거대 공간에서의 압도적인 공간감이, 탱크 재료를 유리로 대체해 파빌리온을 구성한 T1에서는 매봉산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자연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서로 멀리 위치하고 있는 각각의 탱크를 연결하는 잘 다듬어진 길은 시민들의 산책로가 돼 이 탱크들을 오가기 좋게 한다.
이들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서는 항공사진에서 보이던 원통형의 조형물은 인식되지 않는다. 다만 세월을 머금은 철판과 새 생명을 틔워내기 시작한 암벽들이 모호해진 경계 안에서 모두 하나의 자연으로 인지될 뿐이다.
매봉산이 인간 세상의 산업화를 위해 자연을 내어준 지 40년여가 지난 지금, 인간이 만든 것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스스로 회복하려는 생명력이 그 장소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본다. ‘문화’비축기지에는 어떠한 문화가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문화 또한 인간의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자연이 품고 있는 이 장소에 앞으로 행해질 문화의 적합성에 대한 고민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매봉산 암벽을 뚫고 새롭게 자라나는 나무가 전달하는 메시지 또한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배세연 한양대 실내건축디자인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