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매슈 본이 셰익스피어 희곡을 현대무용극으로 재해석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모습. LG아트센터
안무가 매슈 본이 셰익스피어 희곡을 현대무용극으로 재해석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모습. LG아트센터
영화, 뮤지컬, 발레 등 수많은 방식으로 재탄생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무용계의 이단아’ 매슈 본이 선보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중 가장 파격적인 작품이다. 매슈 본은 고전 발레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과감하게 재해석한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의 작품으로 무용계에 반향을 일으킨 영국 출신 안무가다. 그는 영국 최고 권위의 공연예술상인 올리비에상을 아홉 번 받은 역대 최다 수상자로, 2016년에는 현대무용가로서 최초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매슈 본의 작품은 고전 발레의 추상적이고 정형화된 동작을 배제하고 현대무용, 탭댄스, 사교댄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표현법을 활용해 ‘댄스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다.

▶▶▶(관련 인물) 매튜 본= 고전 발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댄스 뮤지컬' 창시자

지난 8일부터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로미오와 줄리엣도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성역화하지 않았다”는 매슈 본의 말대로 파격적이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무용극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원작 속 이야기 구조를 과감하게 벗어난다.

작품은 ‘베로나 인스티튜트’를 배경으로 한다. 기관이라는 뜻을 지닌 인스티튜트(institute)라고 불리는 이곳이 정신병원인지, 학교인지, 수용소인지 모호하다. 원작의 핵심인 두 귀족 가문 간 대결 구도도 과감히 덜어냈다. 그 자리에는 대신 경비원과 입소자들 사이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경비원들은 입소자를 통제하고 억압한다. 입소자는 죄수복 같은 하얀색 유니폼을 입고 경비원의 명령에 복종한다. 경비원이 부는 호루라기 소리에 박자를 맞춰 움직이는 입소자들의 몸은 마치 목각 인형처럼 관절을 모두 빳빳하게 편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

경비원 중 한 명인 ‘티볼트’는 이런 권위를 활용해 줄리엣을 추행한다. 그는 줄리엣에게 명령을 내려 따로 불러낸 후 강제로 껴안는다. 줄리엣이 거부하며 도망가려고 하지만 티볼트는 무력으로 자신의 방으로 끌고 간다. 이 모습을 본 다른 경비와 의사들은 못 본 체하고 무시한다. 입소자들은 불만을 느끼고 저항하려 하지만 권위에 압도당해 감히 반항하지 못한다.

이때 로미오가 베로나 인스티튜트에 입소한다. 줄리엣은 처음에는 학대로 인한 상처 때문에 로미오를 경계하지만 함께 춤을 추며 가까워진다. 사랑에 빠진 이 둘은 ‘춤 역사상 가장 긴 키스’라고 불리는 장면에서 서로를 껴안고, 계단을 오르며, 바닥에 뒹굴고, 난간에 매달리며 쉬지 않고 격정적으로 입을 맞춘다.

자유롭고 순수한 사랑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을 해치려는 티볼트에게 저항하다가 그를 죽인다. 둘은 트라우마와 공포에 사로잡혀 발악하는 몸짓으로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한다. 줄리엣은 결국 환각에 빠져 로미오를 살해하고 스스로를 칼로 찔러 목숨을 끊는다.

작품은 폭력, 정신질환, 동성애, 트라우마 등 민감한 주제를 과감하게 그려낸다.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나란히 누운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습에 동성애자, 청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피해자, 여성 등 어떤 형태로든 억압받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

대사 하나 없이 등장인물들의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한 안무도 신선하다. 몸짓만으로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과 자유를 향한 갈망, 사랑 등이 뼈저리게 전해진다. 도발적이고 과감한 무용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원초적인 몸짓을 통해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공연은 5월 19일까지.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