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들은 도자기, 무기, 장신구, 옷 같은 유물의 모양, 형태, 기능 등을 연구해 당시 문화나 기술 수준,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낸다. 여기에 과학기술이 더해지면서 유물 연구는 더 많은 사실을 밝혀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까지 가세하며 지금까지 불가능하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베수비오 프로젝트' 이야기다.
숯처럼 까맣게 그을린 고대 파피루스문서의 모습. 이를 펼치려고 하면 부서져버렸다. ⓒ베수비오 챌린지
숯처럼 까맣게 그을린 고대 파피루스문서의 모습. 이를 펼치려고 하면 부서져버렸다. ⓒ베수비오 챌린지
베수비오 프로젝트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망가진 유물의 내용을 AI로 읽어내는 대회다. 유물 연구는 고고학자의 영역이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대회를 열고, 정보를 대중에게 공개하며 연구해달라니. 이 대회가 열리게 된 전말은 이렇다.

2000여 년 전, 이탈리아 나폴리 지역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이로 인해 폼페이를 비롯한 주변 도시가 묻히고 말았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후세 사람들에 의해 이때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불에 탄 두루마리 형태의 파피루스문서도 그중 하나다.

파피루스문서는 발견 당시 숯처럼 까맣게 그을린 상태였다. 종이는 보통 불에 타버리지만, 발화점 이상으로 뜨거운 잿더미에 오래 노출되면서 오히려 타지 않고 탄화됐다. 숯이 되는 과정과 같은 원리다. 문제는 탄화된 파피루스문서는 살짝만 건드려도 우수수 부서져버린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두루마리처럼 돌돌 마는 종이를 책 또는 문서로 사용했다. 그러니 고고학자들은 안의 내용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손만 대면 부서져버리니, 난감했다.

결국 이 유물을 연구하기 위해선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안의 내용을 읽어내야 했다. 미국 켄터키대 컴퓨터과학과의 브렌트 실스 교수팀은 X-RAY와 고해상도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찍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두루마리 안쪽에 글씨가 적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종이들이 워낙 겹겹이 겹쳐 있어서 문자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정확한 내용을 알아내기에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의 지식을 모아야 할 때라고 판단했고, 대회를 열었다. 2023년 2월 파피루스 두루마리 문서를 촬영한 사진 수천 장과 문서 조각을 공개하고, AI 프로그램을 활용해 안의 내용을 해독하는 사람들에게 상금을 수여하겠다고 발표했다. 상금은 무려 100만 달러였다.

지금까지 대회에 참여한 사람은 1500여 명.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이 이용한 AI 프로그램, 학습 방식, 발견한 글자 등을 사이트에 공개했다. 이를 통해 전 세계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데이터를 활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전 세계 두뇌가 모여 불가능해 보이던 고대 문서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 눈에 띄는 성과를 낸 사례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됐다.
대회를 통해 밝혀진 첫 번째 단어는 ‘보라색’이다. 이를 통해 당시 보라색을 쓸 수 있었던 귀족들의 생활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베수비오 챌린지
대회를 통해 밝혀진 첫 번째 단어는 ‘보라색’이다. 이를 통해 당시 보라색을 쓸 수 있었던 귀족들의 생활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베수비오 챌린지
처음으로 해독한 단어는 다름 아닌 ‘보라색’이다. 컴퓨터과학을 전공하고 있는 루크 패리터는 글씨를 쓰는 과정에서 잉크가 스며들 때 종이의 표면이 미세하게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 차이점을 이용해 글씨 부분을 읽어내는 AI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리고 보라색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πορφραc’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유세프 나데르는 패리터의 연구 결과를 활용해 추가로 그리스어 ‘ανυοντα’와 ‘ομοιων’를 찾아냈다. 이 단어는 ‘성취’, ‘유사하다’라는 뜻이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소속된 팀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무려 2000개의 단어로 이뤄진 네 구절을 읽어냈다. 이는 한 개의 두루마리 문서 내용 전체에서 5%에 해당하는 양이다. 이를 해석해본 문서에는 쾌락주의를 기치로 삼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적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재화를 통해 쾌락을 느낄 수 있는가’, ‘즐거움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결핍이 풍족보다 행복하다고 믿지 않는다’ 등이었다. 이 결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밝혀진 단어들을 통해 숯이 돼버린 파피루스문서에 귀족들의 생활이 담겨 있을 거라고 추정했다. 보라색은 당시 귀족들만 쓸 수 있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에피쿠로스의 추종자인 철학자 필로데무스가 정리한 문서이며, 이 문서가 발견된 곳이 필로데무스의 서재였던 것으로 분석했다. 나아가 이 주변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방이 많은 만큼, 앞으로 그의 서재를 더 발굴하고 분석하면 고대 세계의 지식과 생활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기억해주세요

[과학과 놀자] 숯덩이 파피루스문서에서 색깔·내용 등 밝혀내
사람들의 지식을 모으기 위해 개최한 베수비오 프로젝트 대회에 참여한 사람은 1500여 명. 이들은 자신이 이용한 AI 프로그램, 학습 방식, 발견한 글자 등을 사이트에 공개했다. 이를 통해 전 세계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데이터를 활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전 세계 두뇌가 모여 불가능해 보이던 고대 문서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윤선 과학칼럼니스트·前 동아사이언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