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주체성을 수반한 창조성으로
1990년대 초반, 쉬커(徐克) 감독의 ‘촉산’ 이후 무림 고수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기 시작한 중국의 2세대 무협영화들이 미국에 소개될 때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미국 학교 영화관에서는 그 유명한 ‘동방불패’, ‘신용문객잔’, ‘소오강호’ 등을 상영했다. 나는 무협영화를 한국에서 수없이 관람했지만, 미국 아이들의 반응이 궁금해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가 상영되자 미국 관람객들이 웃었다. 처음에는 의아해했지만, 무림 고수가 “흡성대법!”이라고 외치는 장면의 자막(special technic for energy suction)을 보는 순간 나 또한 웃음이 났다.

‘강호의 고수들이 규화보전을 쟁취하고 무공을 연마해 천하를 얻는다’를 어떻게 영어로 옮겨야 하나? 영화 상영 내내 번역 오류는 계속됐다. 나 또한 ‘강호’란 한 단어조차 영어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배틀필드(battle field)는 당연히 아닐 것이고. 위의 말들을 한자 문화권의 동양인들은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지만, 서양인들이 이해하려면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언어의 세계와 세상의 세계가 일치한다고 생각한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상을 그려낸다는 ‘그림 이론’을 제시했다. 언어는 인간 내면의 정체성과 본질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서양에 의해 강압적 근대화를 이룬 우리는 스스로 그 위계적 차이를 용인하고 순응한 게 아닐까. 동서양 문화는 다르다. 서양은 이원론을 바탕으로 하는 타력본원이었지만 동양은 합일론을 바탕으로 하는 자력본원이었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은 크립톤 행성 외계인이거나 방사능 거미에게 물렸거나 기계의 힘을 빌려서 초인이 된다. 그러나 동양의 초능력자들은 스스로 수행하고 깨우쳐서 평범한 인간에서 초인으로 거듭난다.

세계는 지금, 문화 중심의 다변화로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요즘의 디지털 세대는 과거 세대의 문화 위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주체적 문화를 창출하고 선도하기 시작했다. 현대미술계에서도 2000년도부터 아시아성 담론이 급부상했다. 한 사회학자는 한국학을 시대적 관점으로 수입학, 비판학, 자립학, 창조학 4단계로 정리했다, 서구 사상과 문물의 압력과 영향, 그에 대한 비판과 대안, 그리고 우리의 주체성과 정체성의 재확립, 이후 모두를 넘어선 창조적 시각과 담론 제시를 말하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는 ‘한류’라는 명칭 아래 지금 전 세계를 이끌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류가 ‘모방성을 수반한 글로벌 창조성’에서 ‘주체성을 수반한 글로벌 창조성’으로 재도약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다. 한국 문화가 전 세계 중심의 당당한 한 축으로서, 앞으로도 지속해서 오랫동안 발전해 나가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