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공천 학살
공천 파동은 늘 있었지만, ‘학살’이란 살벌한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00년 16대 총선 때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등 현역 의원 43명을 일거에 낙천시켰다. ‘2월 18일 금요일의 대학살’로 불렸다. 공천 학살은 대체적으로 보수 정당에서 이어졌다. 2008년 18대 총선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로 유명한 친이명박계의 친박근혜계 학살이, 4년 뒤엔 친박계의 친이계 ‘보복 학살’이 진행됐다. 2016년엔 유승민계 학살로 이어졌고, ‘옥새 나르샤’ 파동까지 낳았다.

공천 학살은 달리 보면 물갈이다. 성공 요건은 얼마나 참신한 인물로 채워 넣느냐, 명분이 있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느냐다.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학살로 인한 빈자리에 오세훈 원희룡 등 국민적 호감이 있는 젊은 신진을 대거 채워 1당을 거머쥐었다. 2008년엔 대대적인 영남권 물갈이로 잘릴 만한 사람들이 잘렸다는 공감을 얻었고, 2012년엔 ‘하위 25% 컷오프’ 등 박근혜식 시스템 공천이 공정했다는 평가를 받아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6년(새누리당)과 2020년(미래통합당)엔 대대적 물갈이를 천명해놓고도 인적 쇄신을 하지 못했고 공천을 둘러싼 파열음만 키워 ‘폭망’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이 두 쪽 났다. ‘비명학살’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말이 터져 나온다. 이재명 대표의 시스템 공천은 어디가고 밀실 사천(私薦)·비선 개입 논란과 정체불명의 여론조사가 횡행하고, ‘하위 10%, 20%’ 평가가 비명계에 집중돼 반발이 커지고 있다.

‘컷오프 5대 범죄’ 기준도 이 대표가 안 걸리도록 피해 나갔다. 피고인이 “형님 꼴찌”라며 불출마를 권유한 것으로 알려진 일도 희한하다. 이 대표는 “1년 내내 바꿀 건가”라며 사퇴 요구를 거부하고 공천 의혹에 대해선 “사실이 아니다”고 했지만, 그의 허언(虛言)과 말 바꾸기엔 이골이 났다. 급기야 전 총리들에 이어 당 고문들까지 “공천이 이 대표의 사적 목적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고 들고 일어났다. 사적 이익은 다름 아닌 더 두터운 ‘방탄’일 것이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