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는 독립전쟁 직후 미국의 임시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오래된 역사 만큼이나 정치, 예술, 교육, 의료의 메카로 손꼽히는 미국의 주요 대도시이다. 자유의 종을 비롯해 도시 곳곳에는 미국 최초의 재판소, 은행 등 미국 정치의 태초를 간직하고 있다. 뜨거운 교육열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한국인들에게는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펜실베니아 대학교가 위치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펜실베니아 대학교는 미국 최초의 의과대학과 경영대학이 세워진 곳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설립자이다.

이 외에도 템플 대학교, 드렉셀 대학교, 토마슨 제퍼슨 의대를 비롯해 스와스모어 대학교, 브린마 대학교, 헤버퍼드 대학교 등 근교에 작은 리버럴 아츠 대학들이 몰려 있어 학술 교류가 활발히 이뤄진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원을 졸업했다는 사실은 교민들의 큰 자랑이다. 또한 도시 안에만 대규모 대학병원이 네 곳이나 있어 의료 시스템이 발달해 있다.
클레이 스튜디오_경계를 넘어서
클레이 스튜디오_경계를 넘어서
활발한 퀴어씬과 비영리 지역 단체활동, 다양한 소수 인종들의 정치사회 운동도 도시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필라델피아 내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민족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전체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점도 상징적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한 도시의 문화와 지적 교양 수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미술관과 박물관들이다. 필라델피아에는 로댕미술관, 반스 파운데이션, 프랭클린 인스티튜트 과학관, 자연사 박물관 등 대형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하나의 구역을 이뤄 들어서 있다.

대학 산하 갤러리도 볼만하다. 미국의 최초 미술대학인 펜실베니아 미술아카데미를 비롯해 필라델피아 현대미술연구소, 무어 디자인 대학교, 예술종합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매년 전세계 예술학도들이 필라델피아로 모여든다. 패브릭 워크샵 & 미술관, 아프리칸 아메리칸 박물관, 아시안 아츠 이니셔티브 같이 중소규모 비영리 예술 단체나 대안공안의 활동도 도드라진다. 뉴욕까지 차로 두시간이면 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사회 초년기 정착지로 필라델피아를 선택한다.
클레이 스튜디오_경계를 넘어서
클레이 스튜디오_경계를 넘어서
문화, 정치, 사회, 예술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는 팔방미인 필라델피아에서 한국 현대미술 “시간의 형태” 전시가 열린다는 사실은 미술사적 가치 그 이상을 의미한다. 특히 문화, 경제적 파급효과가 어마어마하다. 도시 안에서만 한국미술 관련 전시회나 심포지엄, 행사들이 줄줄이 열리고 있다. 대표적으로 클레이 스튜디오에서는 “시간의 형태” 전시에 맞춰 한국 현대도자기 전시인 “경계를 넘어서”를 선보였다. 클레이 스튜디오는 1974년에 처음 문을 연 비영리 문화센터이다. 각종 도자기 가마와 관련 자재들을 완비하고 있고 매일 도자기 관련 수업과 워크샵이 열린다. 건물 내에는 레지던시 작가 작업실과 갤러리도 있다.

“경계를 넘어서” 전시는 클레이 스튜디오 큐테이터인 제니퍼 즈윌링과 제임스 매디슨 대학교 미술학부장으로 있는 이미영 작가가 공동 기획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12명의 한국인 도자기 작가들을 모은 그룹전이다. 작가들의 공통된 이력으로는 한국에서 자라 대학원 교육을 위해 미국까지 왔다는 점이다. 현재 레지던시 작가인 유진식, 최민아, 최수진도 전시에 참여했다. 한국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잠시 일했던 유진식은 군 복무 시절 성소수자 집회 진압에 투입되면서 느꼈던 상실감과 절망을 흙을 이용해 풀어낸다. 미국에 건너와 도자기를 배우면서 한국에서 겪었던 성에 대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와 통념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달에는 작가들의 이런 디아스포라 경험에 초점을 맞춘 심포지엄도 행사도 열렸는데 방청자의 상당수가 비아시아계 미국인들이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비롯해 교육 시스템, 정치 상황 등 사회 전반에 대한 질문이 잇따랐다. 미술을 통해 한국을 알리는 기회였다.
요즘 필라델피아엔 한국 현대미술의 깃발이 태극기처럼 펄럭인다
이외에도 필라델피아의 대표적 미술대학인 템플 대학교의 타일러 스쿨 산하 현대미술 갤러리에서는 국제현대장신구전인 “장식적 디지털리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민대학교와 템플대학교의 금속공예학과가 협력한 전시로14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전시를 공동 기획한 템플대학교 더그 부치 교수와 이탈리아계 작가인 로라 포르테를 제외한 12인이 한국 작가이다. 국민대학교 측에서는 이승열 교수가 공동 기획자로 참여했다. 장신구를 추상적 형태로 풀어낸 조각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다양한 디지털 기술과 수공예 기법들을 총동원한 작품들을 통해 한국 작가들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템플대학교_장식적 디지털리즘
템플대학교_장식적 디지털리즘
뿐만 아니라 필라델피아의 대표적인 상업 갤러리 중 하나인 락스갤러리에서는 “시간의 형태” 전시에 맞춰 일찍부터 한국 현대 실험미술의 선구자인 이강소의 개인전을 준비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이강소의 작품이 최초로 소개된 자리로 단순하지만 역동적인 붓질의 대규모 회화와 조각 작품들이 대거 포함됐다. 현재 락스갤러리를 이끄는 수연 락스는 한국인으로, 2017년 크리스토퍼 류와 휘트니 비엔날레를 공통 기획했던 미아 락스와는 모녀사이다. 락스갤러리는 주로 유럽이나 미국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만 취급하는 곳으로 “시간의 형태” 전시가 한국 작가들을 소개할 발판이 되어 준 셈이다.
요즘 필라델피아엔 한국 현대미술의 깃발이 태극기처럼 펄럭인다
또한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펜실베니아 대학교는 “시간의 형태”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이달 말 공동으로 다양성에 대한 학술 심포지엄을 주최할 예정이다. 같은 날 미술관의 무료 야간 개방일인 ‘프리 프라이데이 나잇’에서는 아시안 아츠 이니셔티브가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DJ 버플 티를 초대해 실험적인 현대 음악으로 미술관을 뒤덮을 예정이다. 동시에 갤러리에서는 미술관 학예팀과 아시안 아츠팀이 관람객을 상대로 릴레이 갤러리 토크를 준비한다. 아시안 아츠 이니셔티브는 필라델피아의 대표적 미술 공간 중 하나로 올해로 31주년을 맞이한다. 전시, 퍼포먼스, 콘서트, 스크리닝, 북 토크 등 다양한 예술언어를 통해 아시안 및 다양한 유색 인종 작가들을 소개하고 후원한다. “시간의 형태”라는 전시 하나가 지역의 문화, 정치, 경제를 움직이고 있다. 황금빛과 황토색을 띈 카소타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미술관 정면에 “시간의 형태”전시 대형 현수막이 마치 태극기처럼 펄럭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