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안보여도 외국어 몰라도…XR만 있으면 되는 시대 올 것"
미국 서부 시애틀 워싱턴대의 메이크어빌리티랩. 이 연구실을 이끌고 있는 존 프렐리히 컴퓨터공학과 교수(사진)가 취재진에 영상 하나를 공개했다. 영상 속 확장현실(XR) 기기를 착용한 남성이 묻는다. “이 외국어로 된 과자는 무엇으로 만들었니”, “이 요리는 어떻게 만드니”. XR 기기 속 비서는 남성의 까다로운 질문에 유창하게 답을 내놨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외국어를 하지 못해도 XR 기기만 있으면 생활이 가능해지는 세상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메이크어빌리티랩은 2012년부터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컴퓨터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있다. 워싱턴대 컴퓨터공학과는 모든 세부 전공이 미국 전체 대학 순위 10위 안에 들 정도로 우수 인재가 모인 곳이다. 1966년 워싱턴대 교수가 제작에 참여한 공군 조종사 훈련장치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는 가상현실(AR)의 초기 기술로 꼽힌다.

XR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실시간 컴퓨터 비전(real-time computer vision)이다. 기계의 시각에 해당하는 부분이 얼마나 빠르게 실시간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프로그래밍할 수 있느냐가 핵심 기술이다. 메이크어빌리티랩의 유일한 재미동포인 이재욱 박사과정을 비롯한 연구진은 최근 테니스공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시속 200㎞를 오가는 6.5㎝ 크기의 테니스공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다면 저시력자도 충분히 많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메이크어빌리티랩에는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대부분 학생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시애틀의 빅테크에서 인턴 과정을 병행한다. 학교와 회사 모두 인재들의 자유로운 연구를 위해 이 같은 병행을 허용한다.

프렐리히 교수는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혁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액셀러레이터가 있다”며 “소프트웨어를 연구하다 보면 데이터센터, 딥러닝 모델학습 등에서 비용 문제에 부딪히기도 하는데 그런 애로사항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기업 지원을 받은 학생들이 연구에 매진하고, 그 결과가 기업 발전에 도움이 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구조 덕에 미국은 XR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유비리서치에 따르면 2018∼2022년 XR 기기를 출시한 업체 수가 가장 많은 국가는 중국(25곳)이었지만,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로 보면 미국(79곳)이 1위였다. 그렇다면 XR 시대는 언제쯤 올까.

프렐리히 교수는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아이폰이 최초의 스마트폰이 아니었지만 아이폰 등장 후 우리가 스마트폰 시대에 살게 된 것처럼 새로운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제품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시애틀=신정은 기자 newye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