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역사학자가 쓴 300쪽 분량의 소비에트연방 역사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장…신간 '아주 짧은 소련사'
러시아혁명을 이끈 레닌은 1918년 암살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후 건강에 타격을 입었고, 1922년에는 급기야 뇌졸중이 찾아왔다.

52세에 불과했지만 시골별장에서 격리된 채 지내며 뒷날을 염려해야 했다.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내에서 후계 구도를 놓고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전을 승리로 이끈 이론가이자 탁월한 웅변가 트로츠키가 레닌 다음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과두정을 이끈 나머지 정치국원들은 그가 프랑스혁명의 열매를 훔친 나폴레옹이 될까 봐 두려워했다.

지바노예프, 부하린, 스탈린 등 정치국원 대부분이 트로츠키를 몰아내는 데 힘을 합쳤고, 결국 성공했다.

세계혁명을 꿈꾼 급진주의자인 트로츠키는 유대인이라는 것과 뒤늦게 볼셰비키에 합류했다는 약점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최종 승자는 스탈린이 됐다.

의외의 승리였다.

당내 소수파 조지아 출신인 그는 직업 혁명가도 아니었고 국제적 배경도 없었다.

그의 혁명 훈련은 오랜 망명 생활이 아니라 감옥과 유배지에서 이뤄졌다.

그는 "회색빛의 흐릿한 사람"이었다.

병석에 누워있던 레닌은 스탈린을 "너무 무례하고, 당의 총서기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언급했지만,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제거한 데 이어 지바노예프와 부하린 등을 차례로 꺾었다.

다른 사람들이 명성을 얻는 사이, 그는 '밀실'에서 지역당 서기를 임명하며 서서히 지방 권력을 장악해 갔다.

트로츠키는 "관료제가 만든 인물"이라고 스탈린을 깎아내렸지만, 스탈린은 관료제를 이용해 정적들을 몰아냈다.

'밀실의 스탈린'은 레닌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장…신간 '아주 짧은 소련사'
호주 역사학자 실라 피츠패트릭이 쓴 '아주 짧은 소련사'(롤러코스터)는 1922년 탄생해 1991년 끝난 소련의 70년사를 정리한 책이다.

1천쪽이 넘어가는 수많은 다른 소련사 책들에 견줘 300쪽 정도의 비교적 적은 분량임에도 슬라보이 지제크가 평가했듯 "간결하면서도 균형 잡힌 시각"으로 소련사의 정수를 담아냈다.

30년 가까이 공포정치를 실행한 스탈린, 1953년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잡았다가 1961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나라를 전쟁 목전까지 몰고 가는 등 '무모한 계획'을 추구하다 1964년 실각한 흐루쇼프의 뒤를 이어 소련의 중흥기를 이끈 브레즈네프가 마침내 권력을 장악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인으로 태어난 그는 지적 허세가 없고, 신중한 실용주의자였다.

많은 이들이 브레즈네프를 평범한 인물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협력의 달인이었다.

권력을 얻기 전까지 정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계책을 꾸미기도 했지만, 총서기가 된 이후에는 정치국원들과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독단적이고 무모한 계획을 지양했으며 집단적 의사 결정을 존중했다.

브레즈네프가 통치하던 시절은 "역사상 최고의 시대이거나 가장 지루한 시대였을 것"이다.

소련은 처음으로 군사적으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 제3국에 똑같은 영향력을 행사했고, 국제 유가 급등기에 석유를 대량 생산하며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국내 분위기는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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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차례로 권좌에 올랐으나 노령이었던 이들은 각각 1년여밖에 총서기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당 지도부는 '젊은 나이'를 차기 지도자의 요건으로 판단했고, 50대 중반에 접어든 고르바초프를 1985년 후임자로 간택했다.

그는 개방적이고, 활력 넘치고, 합의를 중시하며 외교에 능한 정치가였다.

고르바초프는 집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개혁 작업을 단행했다.

경제 재건과 개혁·개방이 핵심이었다.

자유가 폭발했고, 당내 민주화가 대폭 개선됐다.

당내 선거에서도 다수 후보가 출마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반체제 인사, 급진파들이 대거 당선됐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인민대표회의에서 옐친과 사하로프가 고르바초프를 맹렬히 비난하는 모습이 소련 곳곳에 방영됐다.

민주화의 속도는 빨랐다.

경제 재건을 반대하는 냉기류도 지역에 팽배했다.

그 가운데 석유 가격도 내려가기 시작했다.

민생도 어려워졌다.

여러 난관에 봉착했지만,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독재자들이 많은 동유럽 대신 서방과 교류 작업을 이어 나갔다.

사회주의자를 경멸했던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고르바초프만은 좋아했다.

그 사이 소련의 지원이 약해진 동유럽은 무너져 갔다.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몰락했고,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공개 처형됐다.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장…신간 '아주 짧은 소련사'
고르바초프 집권기 동안 모스크바는 수년 전과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가판대에는 마르크스주의 책이 아니라 포르노 잡지, 점성술, 미용 안내서, 초능력, 반유대주의 소책자, 종교서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진열됐다.

석유 생산량도 계속 줄어들었다.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주안점을 둔 사이, 고르바초프의 높던 지지율은 1990년 20%, 1991년에는 0%로 추락했다.

그는 소련연방 15개국을 대표하는 연방 대통령이 됐지만, 러시아연방의 옐친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대통령은 하나둘씩 연방을 탈퇴했다.

고르바초프는 곧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고, 이를 진압한 옐친이 러시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됐다.

고르바초프의 실각과 함께 소련 연방은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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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은 고르바초프가 개혁작업을 시작할 때 경제개혁을 하지 않은 채 정치개혁에 나선 것을 두고 "바보" 같은 행위라고 평가절하 한 바 있다.

어쩌면 성급한 개혁 작업이 고르바초프의 발목을 잡았을 수도 있다.

프랑스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알렉시스 토크빌은 저서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일반적으로 나쁜 정부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개혁에 착수할 때다"라고 말한 바 있다.

토크빌의 말은 고르바초프에게도 적용된다.

비록 고르바초프는 '구체제'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혁명을 다시 활성화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안종희 옮김. 308쪽.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장…신간 '아주 짧은 소련사'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