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베를린공항 수화물창구에서 2시간여동안 수화물이 나오지 않아 승객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하인식 기자
지난 9일 베를린공항 수화물창구에서 2시간여동안 수화물이 나오지 않아 승객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하인식 기자
지난8일 독일 베를린공항에서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타고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출발해 이날 오후 1시6분에 베를린공항에 도착한 승객들은 수화물을 2시간여 뒤에야 찾을수 있었다.

더욱 이해할수 없는 일은 뮌헨에서 11분 늦게 도착한 루프트한자 항공 승객들은 바로 문제의
수화물창구에서 수화물을 모두 찾아간 뒤에 빚어졌다는 점이다.

독일 승객들은 여느 때 일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애써 인내를 하는 것인지 아예 체념하는 것인지는 확인할수 없다.

하지만 이를 처음 경험하는 해외 여행객들은 공항측에서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찾아볼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승객들이 2시간여동안 수화물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항공사와 공항측에서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승객들이 2시간여동안 수화물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항공사와 공항측에서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한국의 한 여행객은 “베를린 공항에 3일전에 도착한 친구는 아직도 수화물을 찾지못해 속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독일에서 이런 사태가 빚어지는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 우크라이나 열차는 폭격 속에서도 제 시간에 도착하는데, 독일 열차는 연착은 물론 한밤중에 내리게 했다. "

우크라이나 작가 스타니슬라브 아세예프가 지난 8월 소셜미디어(SNS)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의 일부다.

독일 국영 철도회사 도이체반(DB) 계정을 링크하고 쓴 이 글에서 그는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날 수도 키이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는데, 주변의 모든 것이 불타고 연기에 휩싸여도 열차는 제시간에 도착했다"면서 "그런데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독일 함부르크까지 장거리 열차를 탔는데 1시간 30분 늦게 오더니 돌연 독일 국경 부근에서 내리라고 해 거리에서 밤을 보냈다. 승객에게 이보다 무례한 철도 회사는 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이 글은 약 110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독일은 관용기 고장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안날레나 베어복 외무장관이 호주 방문을 취소하는 망신을 당한 사례도 있다.

이를 두고 25년 전에 이어 독일이 또다시 ‘유럽의 병자’로 추락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코노미스트 지는 최근 2000년대 초 일련의 개혁을 통해 황금기를 맞이했던 독일이 성장의 후발주자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보도는 국제통화기금(IMF)를 인용해 유럽은 올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경제 규모가 축소될 수 있다면서 특히 독일은 향후 5년 동안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보다 더 느리게 성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독일의 추락은 성공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노동 및 연금 개혁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하르츠 개혁’에 성공한 뒤 메르켈 정부에서 독일은 유럽연합(EU)의 리더로 떠올랐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기술을 바탕으로 수출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후 수년 동안 독일은 오래된 산업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뒀지만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는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집착으로 철도와 연방군 뿐 아니라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도 지나치게 적어졌다. 특히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보기술(IT) 투자 비율 미국과 프랑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관료적 보수주의도 걸림돌이다. 사업을 운영하기 위한 면허를 취득하는데 평균 130일이 걸리는데 이는 OECD 평균의 두배에 달한다.

지정학적 위기는 독일에 닥친 위기의 근원이다. 독일이 주요 서구 경제대국 중 중국 의존도가 가장 높기 때문이다. 지난해 양국간 교역액은 3140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독일 자동차 브랜드는 중국 경쟁 브랜드와의 시장 점유율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서방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디리스킹(탈위험화)’를 추구하면서 핵심 광물 등 일부 민감한 분야에서는 아예 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 각국 정부는 첨단 제조 및 공급망 강화를 위해 보조금을 쏟아내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 광범위한 공급망을 바탕으로 비교우위를 가져온 독일 기업들을 위협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도 독일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독일의 산업 분야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지만 더이상 저렴한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할 수 없다. 전력망에 대한 투자 부족과 느린 허가 시스템은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방해하고 있으며 제조업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문제는 1990년대 슈뢰더 연립 정부와는 달리 정치권이 개혁에 쉽게 나서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녹색당으로 구성된 현정부는 연정 내 분열이 심해 해결책 합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 전국적으로 20%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내년 일부 주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제기되자 기존 정당은 급진적인 변화에 더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독일의 부진은 한국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독일과 한국의 경제구조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독일과 같은 침체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도 독일처럼 최근 20년간 중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제조업 위주의 산업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이 첨단제조업이 아닌 전통적 제조업이라는 점도 유사하다. 노동시장도 고령화 추세가 가파르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고용이 안정적인 상황이지만 고령층이 노동공급 증가세를 견인하는 모습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독일의 상황과 흡사한 것으로 평가됐다. 약 15년 후인 현재 독일이 겪는 것과 같은 급격한 노동력 부족 현상이 한국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로 파악된다.

전문가들사이에는 제조업 도시 울산도 이같은 대응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고숙련 근로자 기반으로 첨단산업 생산성을 높이고, 외국인 노동자 유입 등 정책방안을 마련해야한다는 지적이 높다.

독일 베를린=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