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올린을 하다 비올라로 바꿔 대학을 갔다. 학부를 마치면 미국에서 공부해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주변에는 유럽 쪽으로 진로를 정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왜 미국을 고집했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지휘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부모님은 둘째의 유학을 반대하지는 않으셨지만, 당시 악기 제작을 공부하던 맏아들이 있는 독일로 가면 좋겠다고 내심 바라셨다.
그런데 웬걸, 둘째의 미국행 선언 때문에 당신들이 떠안을 부담은 커졌고,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였는지 ‘유학을 정말 꼭 가야겠냐’부터 ‘누구누구처럼 오케스트라 들어가서 활동하면 좋지 않겠냐’ 같은 회유책으로 공략하며 둘째와의 줄다리기를 이어갔다. 암울했던 IMF 사태는 정점을 찍었고, 이후 1달러가 1400원으로 내려가던 어느 날 한국을 떠났다.

아내는 글쟁이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고, 졸업 후 글을 쓰고 다듬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는 뜻을 품고 스웨덴과 영국에서 전공과 상관없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였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 런던 유학 시절 룸메이트의 소개로 알게 된 정체불명 미국 유학생과 대양을 건넌 세 번의 만남 끝에 결혼에 골인해 미국으로 왔다. 첫 이메일을 주고받은 지 다섯 달 만이었다.
당시 뉴욕으로 이사하자는 아내의 제안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박사 과정도 지휘와 악기를 함께 공부하던 중이었고 이미 큰 산 하나를 넘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사를 하더라도 학교와 비교적 가까운 시카고 정도면 좋겠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내는 강경했다. 어차피 믿는 구석이 없기는 시카고나 뉴욕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냐고 내 이름까지 들먹였다. 이름만 봐도 ‘동녘 동’에 ‘민첩할 민’이니, 지금 당장 동쪽으로 가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설득되고 말았다.
얼마 후 큰 트럭을 빌려 차곡차곡 짐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는 동쪽으로 14시간을 달렸다. 살아보거나 공부했던 곳이 아닌, 비빌 언덕조차 없었던 미지의 땅 뉴욕으로. 지인이 살던 집 앞에 이삿짐 트럭을 세워두고 방을 구하러 나갔던 바로 그날, 작고 오래된 아파트를 찾았다.

뉴욕에서의 삶은 예상치 않았던 여정의 연속이었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탐색기가 끝나자마자 작은 단체를 시작했는데 이 악단이 벌써 14년을 맞았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때는 없던 시나리오였다. 아내 역시, 품었던 뜻을 뒤로하고, 원래 전공과도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분야에 종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세월을 타고 흐르는 굴곡과 어긋남이 얽혀 오늘을 만들었다. 한 번도 뉴욕을 꿈꾸지 않았지만, 지금은 누구나 꿈꾸는 뉴욕에 살고 있다. 나는 뉴욕의 동네 음악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