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오는 날은 재료가 품은 물기도 마르지 않는다. 습기가 말라야 접착제를 바르면 떨어지지 않고 견고한 물건이 될 텐데. 손으로 상태를 가늠해볼 뿐 그런다고 머금은 습기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표면에 바른 안료(옻칠, 유약 등). 틈새에 발라둔 접착제도 잘 마르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마냥 미룰 수는 없어 한여름이어도 불을 피우거나 바닥 난방을 돌려본다. 일단 급급하게나마 속전속결 작업실 습기를 제거해보려 하나, 습기에 열기까지 더해 후끈 달아오른 작업실에 몸을 움직여 무엇을 한다는 것이 어찌 쉬우랴. 그저 오래 머무는 것 자체가, 바쁜 마음을 참는 것이 고역이다.

농사를 짓든 재료의 상태에 따라 일을 하는 사는 자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는 자다. 속절없이 내리는 비가 야속한 때가 어디 하루 이틀뿐이랴 싶지만 모든 날이 같다면 그 또한 재미없고 지루한 날의 연속이다. 재료와 공정을 공예가의 의지와 계획대로 할 수 없다면, 날씨와 계절, 환경이 주는 시간의 제약, 변화에 따라 마음과 몸, 작업의 리듬을 맡기는 것도 방법이다. 인간이 내리는 비를, 차오르는 습기를, 무더운 더위를 완전히 작업실 바깥으로 밀어내고 막을 방도는 없으니 수긍하고 누구도 아닌 나의 마음을 다독이란 그 말이다.

도예가가 흙을 어떤 방법으로 만들던 간에 그것은 인간의 의지를 자연의 재료에 불어넣은 ‘인위(人爲)’다. 인간은 무엇을 만들려 하지만, 자연에 배속된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식물, 산과 바위, 물줄기는 모두 무위(無爲)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자연은 누군가 일으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나고 수그러든다.
비 오는 것도, 바람 부는 것도, 태양이 뜨는 것도 자연이 스스로 때를 알아서 행한다. 지구상 사는 모든 존재 중에 오직 인간만이 비 오고 내리는 것을 조절하려 한다. 바람을 불거나 멈추게 하려 하며,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안달이다.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을 무시하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산을 깎고 물길을 바꾼 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자연재해와 이상기후, 새로운 질병 창궐, 생명 소멸의 원인이 바로 우리 욕심이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비가 멈추면 썼던 우산을 거두면 되는 자연스러운 일을 왜 인간은 하지 못할까.
자연이 스스로 하는 바를 관찰하고 자연이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면 나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이해와 분별이 생긴다. 이것이 한국문화에 오랫동안 스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세계다. 자연을 늘 인간의 의지 상위에 두는 겸허의 태도 때문에 한국 미술의 원형은 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고 자연을 닮으려 해왔다.
자연을 최고의 예술 가치이자 원형으로 여겨 인위보다 무위를 항시 상위에 두는 태도는 한국 전통미술뿐 아니라 한국현대미술, 현대공예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인간이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자연법칙에 준해 무엇인가를 만든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것은 자연 스스로 한 것에 비해 언제나 부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을 예술로, 공예로 가져올 수 있을까.

비가 오면, 비의 양과 기세를 보아 얼른 도판 위에 준비해 두었던 안료, 산화물/염화물 등을 판 위에 뿌리고 도판을 밖에 내다 놓아야 한다. 빗물을 받아낼 흙판을 기울일 각도, 빗방울에 노출될 시간과 면적 등에 따라서 비의 흔적이 달라진다.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비가 흙판 위에 내리면, 빗물의 강하 속도, 강수량, 강도에 따라 흙판에 다른 흔적이 남는다. 작가는 흙 위에 어떤 사건의 흔적이 남을까 기대하며 그것을 바라본다. 무엇을 만드는 일은 인위다. 그러나 곽혜영의 일은 인위보다 비라는 무위가 무엇을 흙판 위에 어떻게 남길지는 무위에 달려있다. 인간은 기다리고 대비하며 획득하고 채집하고 고온의 불로 굽는다. 그리고 흙, 물, 불-자연이 스스로 도모한 무위를 가마 속에서 꺼낸다.

공예의 즐거움은 물질적인 무엇을 내 것으로 사유화하여 사용하고 바라보는 행위로는 온전하지 않다. 공예품을 곁에 두고 사용하고 감상할 때마다 나는 공예가들이 무엇을 만들기 위해 보냈을 시간, 절체절명의 결과를 얻기 위해 조바심쳤을 절치부심과 수고로움을 생각한다. 작가가 무엇을 만들기 위해 보냈을 시간과 생각, 그들의 감각과 시선이 향하는 곳을 꼼꼼히 살피며 찾으면서 내가 찾아낸 것과 나의 것을 천천히 맞춰본다. 작가의 것과 나의 것을 일체화하는 것, 생각을 같이하는 닮음과 공감의 과정이 공예의 실체요,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