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열음.
피아니스트 손열음.
러시아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가 쓴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악마의 협주곡’으로 불린다. 40여 분간 초인적인 기교와 힘, 광적인 속도, 광폭의 음역, 폭발적인 표현력 등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곡으로 악명이 높아서다.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삶을 다룬 영화 ‘샤인’에서는 이 곡을 두고 “미치지 않고서는 칠 수 없는 작품”이라 표현했을 정도다. 그만큼 웬만한 실력으로는 엄두도 못 낼 난곡(難曲)이란 의미다.

하지만 솔리스트가 2009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와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이후 세계무대에서 활약 중인 피아니스트 손열음(37)이라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탄탄히 쌓아온 기량을 마음껏 펼쳐낼 기회가 될 수 있어서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고 한국 청중과 만난다. 오는 9월 1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독일 명문 악단 도이치 방송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협연자로서다.

손열음은 1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극한의 기교를 요구하는 곡이지만 그에 매몰되기보단 라흐마니노프가 악보에 그려낸 섬세한 감정선을 살려내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호흡을 길게 끌어가면서 러시아 음악 특유의 웅장함, 장대함을 펼쳐내는 데에 힘을 쏟을 것”이라며 “완성도 높은 연주로 거대한 희열감과 쾌감을 불러일으키겠다”고 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피아니스트 손열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은 어릴 적부터 수없이 연습한 작품이에요. 협주곡 2번에 우리가 보편적으로 느낄만한 감정들이 주로 담겼다면, 협주곡 3번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사적인 감정들과 그가 떠올린 환상들이 녹아있죠. 그래서 이 곡에서만큼은 더욱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회화적인 감성을 살려내고 싶단 욕심이 커요. 마치 어떤 이미지가 앞으로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음악에서 살아 숨 쉬는 형상을 들려주는 거죠. 그래야 라흐마니노프의 내면까지 잘 전해질 테니까요.”

손열음은 도이치 방송 오케스트라가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는 협연자 중 하나다. 2014년 프랑스 현지·내한 공연, 2021년 독일 현지 공연 등에서 합을 맞춘 바 있다. 그는 “도이치 방송 오케스트라는 베토벤과 브람스로 이어지는 독일 정통 사운드를 계승하면서도, 남서부 지방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음색을 지켜온 악단”이라며 “특히 음향 전체의 무게감을 잡아주는 저음 현의 독특한 색채는 어떤 악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여러 번 호흡한 악단인 만큼 앙상블에서만큼은 걱정이 없다"며 "분명 만족할 만한 연주를 들려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의 지휘봉은 도이치 방송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와 일본 재팬 필하모닉 수석지휘자, KBS교향악단 음악감독을 겸하고 있는 ‘젊은 거장’ 피에타리 잉키넨이 잡는다. 그와 손열음은 앞서 2021년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열린 심포니 콘서트에서 만남을 가진 바 있다. 손열음은 잉키넨에 대해 “과감한 추진력과 결단력으로 악단의 방향성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지휘자”라고 했다.

“그는 언제나 작품에 대한 정교한 분석과 확실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요. 악단을 통솔하는 역량뿐 아니라 솔리스트와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가기 위해 소통하는 능력도 뛰어나죠. 그와의 작업에선 지루할 틈이 없어요.”
피아니스트 손열음.
피아니스트 손열음.
올해 도이치 방송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은 손열음에게 각별하다. 원래 2020년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여파로 줄곧 연기되다 올해 드디어 성사된 무대라서다.

“지난 3년간 몇 번이나 공연 얘기가 오갔는데, 코로나 탓에 매번 무산됐어요. 레퍼토리도 계속 바뀌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공연은 못 하게 되나 보다’ 체념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다시 무대에 서게 되니 감회가 새로워요. 코로나로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금 끌어와 관객들과 공유하는 무대 같달까요. 확실히 다른 공연보다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손열음은 어떤 음악가로 기억되고 싶을까. “연주 자체가 흔적이 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연주자들을 떠올려 보면 온전히 그의 음악, 소리로만 기억되더라고요.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상을 받은 음악가인지, 국적이 어디인지 등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요. 저 또한 청중에게 어떤 수식어가 아닌 오롯이 연주로 각인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청중이 가장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가 되는 방법이 아닐까요.”

도이치 방송 오케스트라가 내한하는 건 2018년 이후 5년 만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의 서곡, 베토벤 교향곡 7번 등이 함께 연주될 예정이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