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걸어가고 있던 길도 그 형체와 의미가 흐릿해 지는 날들이 있다. 특히 몸이 고달프고 마음이 시달린 날들이 그렇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 혼이 쏙 빠져버린 그런 날. 술 한잔에 나를 달래보아도 한번 흔들린 머리가 좀처럼 다시금 중심을 찾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음악이 가장 필요한 날은 바로 이런 날이다. 나의 내면에서 끌어낼 수 있는 힘이 고갈된 그런 날, 다른 어떤이의 에너지를 수혈받아 오늘을 버티고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 음악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베토벤이 점점 어두워 지는 청력에 낙담한 나머지 목숨을 끊고자 했던 마음을 다잡고 써내려간 교향곡 3번, “에로이카"를 듣고 마음을 다잡을 수도 있고, 차이코프스키 6번 교향곡의 피날레를 들으며 승리를 다짐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이는 신나는 걸그룹·보이그룹의 팝 장르에 열광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도 하고 클럽에서 바닥까지 덜덜 떨리는 듯한 볼륨의 힙합의 분노 가득한 라임과 그루브에 몸을 맡기며 그 모든 것을 잊고 하룻밤을 즐기며 다시 한번 내면을 충전하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 이런 날에는 꼭 들국화의 1집 앨범을 들어야 한다.

▲들국화 1집 앨범

사실 12개의 음으로 만들어진 음악만을 생각하도록 철저히 트레이닝 되어온 나에겐 조금 의아한 앨범이다. 거칠게 정제되지 않은 음정이 그렇고 음악적인 영향도 너무 많이 뒤섞여 있어 아리송한 순간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엔 아찔한 힘이 있다. 순수하고 직접적인 고백으로 가득한 이런 말들을 들어야만 하는 날들이 있기에 그럴 것이다.

20대 후반, 감당하기 힘든 나날들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이 그렇듯 사람간의 일들을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해 마음이 힘들었고,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업무들도 도무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에 그저 몸을 갈아넣으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도무지 뭐가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달까. 그때는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한시간 정도 차로 운전해야 하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장거리라도 운전해서 가는 것이 마음이 편했기에 연주도 운전해서 가는 일이 잦았다. 잠 자는 시간도 아껴야 하는 나날들이었는데,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밤 늦은 시간 장거리 운전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늦게 업무를 끝내고 그 다음 연주 일정을 위해 새벽 12시쯤 운전을 시작하거나 하는 일들이 일과인 나날이었다고나 할까.

기나긴 하루 지나고 / 대지 위에 어둠이 / 오늘이 끝남을 말해 주는데 / 오늘의 공허를 메우지 못해 / 또 내일로 미뤄야겠네 / 꿈 속에 내 영혼 쉬어 갈 사랑 찾아서 / 아침이 밝아올 때 까지 / 내 몸 쉬어 가면 / 사랑하는 여인을 꿈 속에 만날까 / 육신의 피로함은 풀리겠지만 / 내 영혼의 고난은 메워질까 / 꿈 속에 내 영혼 쉬어갈 / 사랑, 사랑 찾아서 / 아침이 밝아 올 때 까지 / 내 몸, 내 몸 쉬어 가면 / 사랑하는 여인을 꿈 속에 만날까

이 가사를 차가 떠나가라 부르며, 나는 그 나날들을 견뎠다. 오늘을 버티면, 조금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믿음 때문에. 그 믿음은 과연 사실이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과연 그 나날들이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모습에 나를 가까이 데려다 주었는지. 하지만 어쨌든 음악은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아침이 밝아올때 까지’가 지나가면 앨범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행진'을 나에게 선물한다.

나의 미래는 /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꺼야 /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 난 노래할 거야 매일 그대와 / 아침이 밝아올 때 까지

가히 백만번 반복되는 듯한 ‘행진’이란 단어를 소리치다 보면 내 안에서 몰랐던 힘이 솟아 오르곤 했다. 마치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위해 외쳐주는 행진곡 같았다. 그 응원을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몸의 피로도, 마음의 힘듦도 사라지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들국화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그것만이 내 세상' 이다.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봐 /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봐 / 하지만 후횐 없지 / 울며 웃던 모든 꿈 / 그것 만이 내 세상 / 하지만 후횐 없어 / 찾아 헤맨 모든 꿈 / 그것 만이 내 세상 / 그것 만이 내 세상
울고 픈 날, 운전하다 차가 떠나가라 들국화 1집을 불렀다
결국 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나는 이 노래를 듣고 외치며 많이도 울었다. 가장 힘든 날, 가장 괴로운 날, 이 노래를 듣고 불렀다. 이렇게 ‘내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고달픈 일이지만 해야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지금도 단지 ‘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에 대한 꿈,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꿈. 그것을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외치는 것, 그것 만이 내 세상이다. 그 외의 것들은 전혀 내가 신경써야 할 일들이 아닌 것이다. 애정이 없어서라기 보다, 그 외의 일들은 내 능력 밖의 일들이기 때문이다. 음악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변하지 않는 건 사랑일 뿐이야” 라는 가사처럼, 목청 높여 사랑을 노래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 음악은 그저, 사랑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