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우, 〈빛이 나지 않아요〉, 《유령의 마음으로》, 민음사, 2022

해파리의 출현은 삶과 죽음을 양가적으로 만들어놓는다. 세상의 멸망을 이끌면서 동시에 현실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나 해파리가 되어 저 넓고 황홀한 세계, 바다로 유영하고자 한다. 해파리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어준 셈인데, 해파리가 해안으로 오기 전부터 이미 현실은 망해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여기에서의 삶보다 해파리가 되어 바다에 사는 쪽을 택하는 일은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 모두 다 이 현실은 지옥이 아닐 터.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치 유혹당한 것처럼 이 변종해파리에게 빠져들고 만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게 해파리로 인해 세상이 망해가는 것은 얼추 이해가 빠른 편인데, 망해가는 세상을 모세의 가나안 땅처럼 바라는 쪽은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뭐가 그들을 해파리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인가.
“빛, 현실에서는 절대 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고 아름다운 빛이 거기에 있었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저렇게 환하고 아름답게 빛날 수만 있다면, 삶에 미련이 없을 거 같았어요.”
삶과 빛(죽음)을 교환해도 전혀 타격감이 없는, 단 한 번도 빛나본 적 없는 삶을 산 자만이 선택하는 해파리 되기. 누구나 빛을 발하고자 사는 건 아니지만, 타인의 빛남을 통해 나의 칠흑을 인지했을 수는 있는 법이니, 그들을 탓할 수는 없겠다. 해파리처럼 빛나고 싶다는 욕망 또한 현재의 삶을 살고자하는 태도일까 의지일까. 그렇게 희망적으로 읽혀지지 않는다. 가끔 소설이 희망적으로 읽힐 때가 싫다. 거꾸로 말하면 소설이 절망적으로 읽힐 때가 좋다는 말. 해파리로 인한 세상의 망함보다 망함을 기다렸다는 듯 ‘빛’을 선택하는 사람의 절망감이 좋다는 말쯤 되겠다. 절대 빛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자들의 선택이 당위를 얻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