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최초 100회 출격 조종사'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 인터뷰
"국민헌금으로 사온 T-6 훈련기로 전쟁 초반 버텨…우린 대단한 민족"
"전쟁 억제하려면 평시에 힘 길러야…젊은세대, 몰입할 일 즐기길"
[인터뷰] "73년전, 전투기 대신 연락기 타고 맨손으로 폭탄던져 싸웠다"
73년 전 오늘 일요일 아침. 23세 청년 김두만 공군 중위는 극장 구경을 하러 서울 노량진의 하숙집을 나섰다.

'쌔앵-'
한강 인도교 북쪽에 전차가 다다를 무렵,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날카로운 소리가 하늘을 찢었다.

김포 쪽으로 2대의 낯선 전투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잠시 뒤 헌병(군사경찰)들이 탄 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방송했다.

"전쟁이 났다.

장병들은 즉시 부대로 돌아가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 서울 시민들에게 알려진 순간이었다.

6·25전쟁 때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한 '살아있는 전설' 김두만(96) 전 공군참모총장은 형형한 눈빛으로 73년 전 그날을 회고했다.

지난 23일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연합뉴스와 만난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보낸 유년기,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일본의 가미카제 임무를 맡을 뻔한 위기를 벗어난 일,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와 공군 창설에 기여하고 조국을 수호한 장면들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전쟁을 잊지 않고 기억해 새 세대에게 전수하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사명인 듯, 한 세기를 살아낸 노병은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랐다.

[인터뷰] "73년전, 전투기 대신 연락기 타고 맨손으로 폭탄던져 싸웠다"
◇ 식민지 소년, 일본에서 비행기에 매료되다
-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셨나.

▲ 1927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3살에 일본으로 떠났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자 막내인 나는 일본에 계시던 작은아버지께 맡겨졌다.

우연히 비행기를 보고 조종사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

15살 이후로는 혼자 취직해 일하며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일본 육군비행학교에 입교하셨다.

자살특공대로 알려진 가미카제에 편입된다는 걸 아셨나.

▲ 처음에는 몰랐다.

기상학과 비행역학 등 기초교육을 받고 1944년 3월부터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다.

일본 규슈에서 기초비행훈련을 마치고 인도네시아 자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가 고등훈련을 받았다.

내가 편입된 곳이 가미카제라는 걸 알게 된 건 1945년 7월 중순 싱가포르에서였다.

'특공대에 편입됐으니 그리 알라'고 하더라. 그때부턴 들이받고 폭격하는 훈련만 했다.

그러다 1945년 8월 초, 일본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수송기를 타고 가던 도중 캄보디아 프놈펜 비행장에 잠시 내렸다.

그사이 전쟁이 끝났다.

가미카제 비행 직전에 살아남은 것이다.

- 일본군 소속이셨으니 고초를 겪으셨을 텐데.
▲ 일본군이었으니 전쟁포로가 됐다.

프놈펜에서 베트남 사이공(현 호찌민)으로 옮겨졌다.

1945년 8월부터 1946년 3월까지 포로 생활을 하다 1946년 5월 일본 해군 구축함을 타고 부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터뷰] "73년전, 전투기 대신 연락기 타고 맨손으로 폭탄던져 싸웠다"
◇ 공군 창설, 국민헌금으로 T-6 훈련기를 들여오다
- 한국군에는 어떻게 편입되신 건가.

▲ 사이공에서 돌아올 때 한국인이 30∼40명이었고, 우리를 이끈 게 김정렬 대위(훗날 초대 공군참모총장)였다.

김 장군이 부산에서 헤어지며 후배들에게 '앞으로 우리나라가 독립돼 정부가 수립되면 국군이 창설되고 공군도 생길 거다.

그때 다시 만나 공군을 만들자' 하셨다.

그러면서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자택 주소를 적어주며 나중에 찾아오라고 했다.

- 공군 창설을 약속하고 일단 헤어지신 뒤로는 어떻게 지내셨나.

▲ 경남 합천의 누님 댁에 의탁하다 세상 물정이 궁금해 1946년 10월 무작정 김정렬 장군이 있는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다 경기도 수원에 계신 매부의 친척분이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병원을 연다고, 조수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안암동 병원과 김 장군의 돈암동 집이 걸어서 10분 거리로 가까워서, 잘됐다 싶어서 병원에 조수로 취직했다.

- 병원 생활이 훗날 군 복무에 큰 영향을 미쳤다던데.
▲ 병원장이 평양 출신이다 보니 이북 사람들이 환자로 많이 왔다.

북에서 공산당의 억압을 못 견뎌 38선을 넘어 월남한 사람들이었다.

그때 난 겨우 스무살이었고 관련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어서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전체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월남하다 북한 인민군과 소련군 총에 맞아 부상한 사람들을 보며 공산주의의 실체를 봤다.

사람에게 마구잡이로 총질하는 잔인한 정권이라는 걸 알게 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삶은 어땠나.

▲ 광복 직후 미군정 산하 남한에는 국군이 없고 '국방경비대'가 있었다.

당시 김정렬 장군의 동생이 국방경비대 정보장교로 있었는데, 이분이 국방경비대 산하에 육군항공대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1948년 육군항공대에 하사관으로 합류했고, 1949년 10월 공군이 창설됐다.

당시 공군이 보유한 비행기라고는 연락기인 L-4, L-5 10여대가 전부였다.

--공군에 전투기가 없었단 말인가.

▲ 갓 독립해 정부 수립을 했는데 무슨 예산이 있었겠나.

공군이 비행기가 필요하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국민헌금을 받았는데, 몇 달 만에 상당한 돈이 모였다.

우린 참 대단한 민족이다.

공군 창설 이듬해 미국에 T-6 훈련기를 구입하겠다고 요청했다.

미 정부에서 한반도 긴장 고조를 우려해 팔 수 없다더라. 정말 낙담했다.

그런데 다행히 캐나다에서 동일한 기종을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다.

캐나다는 T-6 제공이 가능하다고 하길래 옳다구나 10대를 도입했다.

그게 1950년 3월이다.

당장 3월부터 조종사 30명이 훈련을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온 교관은 1명뿐이어서 30명을 다 할 순 없으니 일단 10명만 했다.

선발된 10명이 계속 훈련을 받고, 나는 1950년 6월부터 탈 순번이었다.

그러다 6·25전쟁이 터졌다.

[인터뷰] "73년전, 전투기 대신 연락기 타고 맨손으로 폭탄던져 싸웠다"
◇ 6·25전쟁 발발…문산철교를 폭파하다
- 6·25 당일을 설명해달라
▲ 그 당시만 해도 군 내부에 프락치가 많았다.

전쟁 전에 L-4, L-5 두 대가 납북됐다.

한 대는 조종사가 프락치였고, 한 대는 정비사가 프락치였다.

후자의 경우 상사 계급이던 조종사가 38선에 삐라(대북전단)를 뿌리는 임무를 받았는데, 소위 계급이던 정비사가 동행을 요구했다.

장교가 말하니 거절할 수 없어 뒤에 태웠는데, 머리에 권총을 대고 북으로 가라고 한 거다.

그렇게 납북이 됐다.

그런 사건이 있었으니 공군 내에선 각별히 조심하고 있었다.

T-6는 거금을 주고 산 귀중한 재산이니 훈련이 끝나면 비행기가 뜰 수 없도록 아예 기름을 다 빼고 격납고에 넣어뒀다.

그런데 6·25가 터지자마자 북한이 격납고를 집중적으로 포격했다.

천만다행 딱 1대만 파괴되고 나머지 9대는 멀쩡했다.

- 6·25 발발 직전까지 T-6 훈련을 못 받은 상태였다고 하지 않으셨나.

▲ 맞다.

1950년 6월 26일 밤,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를 받아오기 위해 10명의 조종사가 일본으로 떠났다.

그날 밤 김정렬 장군이 날 만나자고 했다.

'당장 T-6 탈 사람이 없는데 자네가 타겠느냐'고 물었다.

난 6월 25∼26일 이틀간 L-5로 정찰비행을 했는데 정말 비참한 심정이었다.

북에서 탱크와 대포를 가진 지상군이 밀고 내려오는데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고작 L-5 타고난 다음 죽기는 억울했다.

그런데 내게 T-6를 타라고 하니 뛸 듯이 기뻤다.

- T-6로 처음 맡은 임무가 문산철교 폭파였다던데.
▲ 6월 27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수원으로 가서 T-6로 한 시간 반 정도 훈련했다.

이착륙, 공중기동을 몇 차례 하고 10시 전에 여의도로 돌아왔다.

그러자 당시 참모부장이던 박범집 대령이 '탈만 하냐, 문산철교로 가라'고 했다.

T-6에 10발의 폭탄을 달고 오전 10시 조금 넘어 이륙했다.

그날따라 구름이 많고 날씨가 좋지 않았다.

급강하하며 폭격하는 법이야 일제시대 훈련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구름 안에 갇혔다.

당시 늘 날씨가 좋은 낮에 훈련했기 때문에 계기판을 보면서 하는 계기비행은 해본 적이 없었다.

감각을 잃겠더라. 잠시 뒤 항공기가 속도를 잃으며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때부턴 무의식적으로 조종간을 당기고 버튼을 눌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비행기보다 공기 저항을 적게 받는 폭탄이 땅으로 빙빙 돌며 떨어지는 게 보였다.

반사적으로 스핀(회전)을 정지시키고 비행기 수평을 맞췄다.

그 순간 폭탄이 지상에 부딪히며 터졌다.

자갈과 모래가 캐노피 안으로 날아들었다.

고도계를 보니 불과 지상에서 40∼50m 높이였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 다른 조종사들은 맨손으로 폭탄을 던지셨다던데.
▲ T-6에는 그나마 폭탄을 간이로 설치할 수 있었지만 L-4, L-5는 그마저도 안 됐다.

앞좌석에 조종사가 타고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폭탄 2개를 옆구리에 끼고 고도 150m에서 맨손으로 던져야 했다.

그런 전쟁을 6월 27일까지 했다.

유엔군이 참전하며 판세가 뒤바뀌었다.

[인터뷰] "73년전, 전투기 대신 연락기 타고 맨손으로 폭탄던져 싸웠다"
◇ 젊은이들, 좋아하는 일에 몰입해 새로운 70년 만들기를
- 6·25 때와 달리 북한은 사실상 핵무장 국가가 됐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 우리도 핵으로 대응하면 좋겠지만 이는 국제적 비핵화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다.

핵을 가지지 않고도 북핵을 제압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올리는 초기 단계에 정확하게 요격해 북한 상공에서 터뜨리는 것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패트리엇, 장거리 지대공유도무기(L-SAM) 외에도 첨단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선 힘을 보여줘야하기, 힘을 보여주려면 평시에 무기체계를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 새 정부에 조언한다면.
▲ 과거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풀이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일본에 시달렸으나 과거 천년 넘게 중국에 시달린 것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일부 정치권에서 친북, 친러, 친중 행보를 보이는 게 매우 우려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역사를 되돌아보고 우리 자손들을 지킬 길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잘못하다간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 후손들이 내가 겪어본 치욕적인 식민지 시대에 다시 빠질까 봐 걱정된다.

-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신냉전이 도래했다는 평가가 많다.

▲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니 냉전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우리가 살아남고 그 이후 펼친 70년 한국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다.

세계가 상상치 못한 결과를 한국이 성취했다.

품격 있는 나라로 세계의 존경을 받으려면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보장하는 동일한 가치관을 가진 나라들과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강력한 동맹이 있어야 한다.

누구랑 동맹을 하겠나.

미국 외에는 없다.

또 우리는 친구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한다.

일본이 우리에게 많은 죄를 지었지만, 언제까지 싸울 수는 없다.

일본이 옛날의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라는 점을 봐야 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도 손잡아 강력한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 지난달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으로 선정돼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장에 관련 영상이 송출되셨다.

소회가 어떠셨는지.
▲ 솔직히 나는 내가 영웅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6·25전쟁 개전 5일 만에 전투 중에 돌아가신 이경복 상사라는 분이 있다.

L-5 연락기를 타고 정찰하다 북한군 지상화기에 피격돼 사망했다.

이렇게 전투하다 돌아가신 동료들이 영웅이다.

살아남은 내가 상을 받기에는 과분하다.

나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긴 했지만 그건 군인으로서 당연히, 성실히 해야 했을 일이었다.

- 96세라는 연세에도 언론 인터뷰와 정부 행사 등에 꾸준히 참여하시는 걸 보면 사명감 없이는 어려워 보인다.

이유가 있나.

▲ 요즘은 정보의 홍수에 가짜뉴스까지 야단인 시대지만, 반대로 1950년은 신문, 라디오, TV가 귀하던 때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어도 온 나라에 공비가 우글우글했다.

사회는 불안했고 하루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그렇게 젊은이들의 미래는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걸 잊어선 안 된다.

잊힌 전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 젊은 세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개인이 행복하면 나라도 잘된다.

여러분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면 좋겠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싶어 군에 들어갔고, 비행기에 몰입했다.

비행기를 타며 삶의 보람을 느꼈다.

공군 생활에 몰입할 수 있어 참으로 행복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몰입하면 자신도 발전하고 국가도 발전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만든 70년의 기적을 넘어서는 새로운 70년의 기적이 생길 것이다.

다만 자신을 헤칠 정도로 지나친 욕심은 내지 않았으면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하며 그 속에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

[인터뷰] "73년전, 전투기 대신 연락기 타고 맨손으로 폭탄던져 싸웠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