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석은 19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우리나라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더욱 높이 발양시키자'라는 제목의 시정연설을 통해 5개 조항의 조국 통일방침을 제시했다.
5개 방침은 ▲ 한반도에서 긴장상태 완화 및 평화적 환경 조성 ▲ 남북한 자유왕래·전면개방 실현 ▲ 평화통일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마련하는 원칙에서 대외관계 발전 ▲ 조국통일을 위한 대화 발전 ▲ 전민족적 통일전선 형성 등이다.
북한은 그 배경으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에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었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급변하는 정세를 예리하게 통찰"한 결과 그 장애요인을 제거하고 통일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당시는 탈냉전 상황으로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로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갈수록 고립되는 시점이었다.
1989년 12월 김일성과 남달리 가까웠던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민중봉기로 처형되고 한국과 옛소련 정상회담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전격적으로 열리기 불과 한 달 전이었다.
북한은 5개방침 제시 일주일만인 1990년 5월 31일 중앙인민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정무원 연합회의를 열고 조선반도(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군축제안을 발표했다.
또 그해 8월 15일 판문점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고 11월에는 북과 남, 해외동포들의 3자 연대를 실현하기 위한 실무적 기구로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조직을 완성하기 위한 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5개 방침 중 평화통일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 조성 방안으로 남북한의 유엔 '단일의석' 공동 가입을 강조한 것은 결과적으로 북한의 전략적 판단 착오로 꼽힌다.
북한은 분단을 영구 고착한다면서 남북한이 유엔에 하나의 의석으로 가입할 것을 주장했다.
1990년 9월 한·소 수교까지 이뤄지는 상황에서 북한은 북미 관계 개선 등 교차승인을 적극 추진해야 했으나 남한의 유엔 동시 가입 제의를 거부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남한은 당초 1988년 이른바 7·7선언에서 남북한 교차승인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중국·소련과 먼저 수교하는 외교적 승리를 거둔 이후에는 입장을 바꿨다.
수세에 몰린 북한은 1991년 마지못해 유엔 동시가입을 받아들이고 그해 말 남북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돌이켜놓고 보면 조국통일 5개방침의 유엔 단일의석 공동 가입을 고집하던 북한은 교차승인 기회를 놓쳐 국제사회에서 더욱 외톨이가 된 셈이다.
이는 북한이 결국 정권 생존 차원에서 비핵화 대신 핵무장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신종대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은 김일성이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 3대 원칙을 내세운 7.4 남북공동성명(1972년)과 자신들이 주도했다고 보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크게 내세우지만, 조국통일 5개방침은 큰 방점을 찍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가운데 북한 매체들은 조국통일 5개방침에 대해 2021년 말 이후로 이렇다 할 언급도 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