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영(28)의 손목이 말썽을 부린 건 2년 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최종전 CME그룹 투어챔피언십부터였다. 시즌이 끝날 때쯤엔 여지없이 손목 통증이 찾아오긴 했지만, 이때는 양상이 달랐다. 고진영의 매니지먼트 세마스포츠마케팅의 홍미영 부사장은 “진영이가 왼 손목 근육이 얇아지고 그 자리에 염증이 생기는 문제 때문에 힘들어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쉬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진영의 선택은 언제나처럼 ‘고(go)’였다. 2008년 왼쪽 무릎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된 상태에서 US오픈 출전을 강행해 우승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8·미국)처럼. 2021년의 고진영은 2008년의 우즈처럼 5승을 쓸어담고 상금왕에 오르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지만, 대신 다음 시즌을 통째로 내줘야 했다. 지난해 3월 열린 HSBC 위민스 월드챔피언십 우승을 끝으로 1년 동안 무관의 설움을 겪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손목이 작년 여름부터 탈이 났기 때문이었다. 커트 탈락과 기권이 거듭되면서 152주간 지켜낸 세계랭킹 1위는 5위로 미끄러졌다.

이랬던 고진영이 다시 정상에 섰다. 고진영은 5일 싱가포르의 센토사GC 탄종 코스(파72·6749야드)에서 열린 HSBC 위민스 월드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에서 버디 4개와 보기 1개를 묶어 3언더파 69타를 쳤다. 최종 합계 17언더파 271타를 친 고진영은 지난해 이 대회 이후 1년 만에 우승컵(우승상금 27만달러)을 들어올렸다. LPGA투어 통산 14승.

고진영의 ‘부활’은 지난주 혼다 타일랜드에서 예고됐다. 공동 6위로 대회를 마치며 7개월 만에 ‘톱10’에 들어서다. 예열을 마친 고진영이 다시 날아오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이 북받친 듯 이날 18번홀 그린에 들어서기 전부터 눈물을 쏟아낸 고진영은 “정말 긴 한 주였다. (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홍 부사장은 “LPGA 개막전에 나가지 않고 회복에 전념한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아직 진영이의 손목 상태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신력으로 이겨냈다”고 설명했다.

이날 고진영의 경기력은 2021년 모습 그대로였다. 주무기인 ‘송곳 아이언 샷’이 완벽하게 살아난 덕분이다. 이 대회 나흘 동안 고진영이 기록한 그린적중률은 88.9%에 달했다. 그린을 보고 친 총 72번의 샷 중 64번을 그린에 올렸다. 3라운드까지 2타 차 선두를 달린 고진영은 전반 9개 홀에서 버디만 3개를 뽑아냈다. 11번홀(파4)에서 이날 유일한 보기가 나오면서 2위와 1타 차로 좁혀지기도 했다. 고진영은 13번홀(파5)에서 4m가 넘는 버디 퍼트를 떨궈 2위 넬리 코다(25·미국)와의 격차를 2타 차로 벌렸고, 그렇게 경기는 끝났다.

고진영의 우승으로 한국 선수의 LPGA투어 대회 ‘무관 행진’은 18개 대회에서 멈췄다. 한국 선수의 최근 우승은 지난해 6월 메이저대회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1위에 오른 전인지(29)였다. 고진영 덕분에 한국 선수의 HSBC 위민스 월드챔피언십 연속 우승 횟수는 4회로 늘었다. 2015년 이후부터 따지면 8번의 대회 중 7번을 한국 선수들이 우승했다. 2020년 대회는 코로나19로 취소됐다.

김효주(28)가 11언더파 277타로 공동 8위에 올랐다. 세계랭킹 1위 뉴질랜드 동포 리디아 고(26)는 5언더파 283타로 공동 31위를 기록했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