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준의 인문학과 경제] 마르크스도 탄식할 '주 52시간제'
‘시간은 돈이다.’ 이 말은 큰돈을 주무르는 사업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매달 매주 매일 일정 시간 일한 대가를 받아 생활하는 모든 직장인에게도 시간은 돈이다. 직장에 몸담지 않은 프리랜서에게도 ‘자유로운’ 노동시간이 일정한 수입으로 전환되기에 시간은 돈이다.

‘시간은 돈’이라는 명제는 자본주의의 비밀을 들춰냈다고 자임하는 카를 마르크스에게도 유익했다. 그는 《자본론》에서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산수단’을 장악한 자본가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에게 노동자로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바를 생산하는 ‘필수노동 시간’만 일을 시키는 법은 없다. 그 시간 이상으로 일을 더 시키는 ‘잉여노동’이 반드시 포함된다. 하루 ‘노동일’을 구성하는 노동시간은 필수노동 시간과 잉여노동 시간으로 선명하게 갈린다. 노동자가 받을 품삯은 필수노동 시간만큼만 계산해준다. 만약 모든 기업체의 모든 노사관계의 ‘본질’이 이렇듯 명료하다면 노동자들이 내릴 결론도 명료하다. ‘노동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며 거주하던 19세기 영국에서 노동시간은 의회의 입법을 통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이 일을 추진하는 운동가나 정치인들은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고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투쟁을 절대 진리로 믿는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애슐리 경(Lord Ashley) 같은 정치인들은 산업혁명 초기에 어린 아동과 청소년들이 장시간 노동에 노출돼 몸과 영혼이 망가지는 모습을 묵과할 수 없었다.

1833년에 10세에서 13세까지 어린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주당 48시간으로, 14세에서 18세까지 청소년은 주당 69시간으로 제한하며 출범한 노동 입법은 1864년에는 미성년자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하루 10시간으로 제한하는 데까지 진화했다. 성인 남성 노동시간은 각자 사용자와 직접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 국가가 개입할 이유가 없다고 봤기에 노동시간 규제 법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세기가 바뀐 후인 1937년의 법안은 하루 9시간 주당 48시간으로 미성년자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제한했으나, 성인 남성 노동 시간은 여전히 손대지 않았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법정 노동시간을 주 52시간으로 엄격히 제한한다. 근로기준법 제 110조에 따라 감히 이 법을 거역한 사업자를 국가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응징한다. 게다가 공정을 숭상하는 정부라 사업장 규모로 노동자의 권리를 차별하지 않는다. 근로자 5인 이상이면 모두 똑같이 이 거룩한 주 52시간의 노동시간을 준수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1867년 독일에서 독일어로 출간했다. 주된 거주지는 영국이었지만, 유대계 독일인인 데다 헤겔의 독일관념론을 자본주의 분석에 적용하는 그의 섬세한 과업을 영어가 감당하기에는 과분했다. 철학과 출신 마르크스는 자신의 심오한 이론을 투박하게 현실에 적용하려 드는 무식한 추종자들이 늘 못마땅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한 축을 이뤄 출범한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강령을 논평한 《고타 강령 비판》(1875)에서 그는 이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천박하게 단순화했다고 꾸짖었다. ‘노동’을 추상적 개념으로 신성화한 것이 제일 큰 오류였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 우월하기에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할 것이며, 더 오랜 시간 노동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노동으로 가치를 측정하려면 각 노동의 지속과 강도를 따져야 해요.” 마르크스는 이렇게 훈수했다.

19세기 말 독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각종 노동의 다양한 지속과 강도, 다양한 노동자 개인 간의 육체적, 정신적 역량의 차이를 무시한 채 주 52시간으로 노동시간을 획일적으로 제한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노동 강령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의 유령은 아마 똑같은 지적을 할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