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조수미가 2006년 파리 샤틀레 극장 무대에서 열린 데뷔 20주년 독창회를 마친 뒤,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슬퍼하는 모습. 사진 출처=유튜브 'smoothiw'
소프라노 조수미가 2006년 파리 샤틀레 극장 무대에서 열린 데뷔 20주년 독창회를 마친 뒤,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슬퍼하는 모습. 사진 출처=유튜브 'smoothiw'
"아버지가 제 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이곳 파리에 성악가로 와있고, 아버지는 제가 여러분께 사랑받는 것을 하늘에서 보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 공연을 아버지께 헌정하고 싶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가 2006년 파리의 샤틀레 극장 무대에서 열린 데뷔 20주년 독창회에서 건넨 말입니다. 전날 아버지 부고 소식에 공연을 포기하고 귀국하려 했다는 조수미는 어머니의 만류에 결국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어머니는 당시 조수미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네가 파리에서 관객과 약속을 지키며 공연하는 걸 더 기뻐하실 것"이라고 위로했다고 하죠.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독창회 표가 오래전에 다 팔린 데다가 공연 실황을 DVD로 녹화하기 위해 다수의 스태프가 기다리던 상태였다고 하죠.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 날 독창회 무대에 오른 조수미는 정규 레퍼토리를 모두 마친 뒤, 청중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합니다. 객석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진 뒤,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른 채 조수미가 부른 작품이 바로 슈베르트의 대표 가곡 '아베 마리아'입니다. 조수미는 최근까지도 당시를 회상하면서 "성악가라는 직업이 이렇게 잔인할 줄 몰랐다"라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평론가들로부터 최고의 연주라는 찬사를 받았음에도, 조수미에겐 그날의 무대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은 셈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직접 보지 못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이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서로의 손을 잡고 온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 세계적인 프리마돈나의 경험에만 국한될 것 같았던 이 슬픔은 이제 우리의 일상으로 드리우고 있습니다.

2년 넘는 시간 우리의 삶을 지독하게 흔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난국 속에서 가족들의 만남조차 제한을 받는 아픔은 이 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 괴로움은 애틋한 자식을 볼 수 없어 창밖만 바라보는 요양병원과 요양시설 내 어르신들에게 더욱 저리는 마음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극도의 간절함과 절실함을 내재하고 있는 슈베르트 가곡 '아베 마리아'를 이 시점에 조명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한 소녀의 절절한 소원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과 맞닿아 있는 오늘, '아베 마리아'를 통한 울림은 오랫동안 가슴을 파고들 것입니다. 늦은 오후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피어나는 잔잔한 피아노 연주에 찬란하고도 청아한 음성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도록 하는 음악,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인간의 간절함, 작품으로 승화

작곡가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는 오스트리아 초기 독일 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로, 베토벤과 모차르트 못지않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11세에 빈 궁정 예배당의 합창 아동으로 채용된 뒤, 모차르트 세기의 경쟁자로 알려진 살리에리로부터 작곡법을 배우게 되죠. 이후 슈베르트는 17세가 되던 1814년에 '물레 잣는 그레트헨' 등 성악곡을 작곡하고, 18세가 되던 해에 '들장미', '마왕'을 비롯한 140여곡의 가곡과 현악 4중주곡, 교향곡 등의 작품을 대거 발표하는 성과를 내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슈베르트는 당시 대중으로부터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슈베르트는 일평생 가난 속에서 허덕이다 31세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사진=한경DB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사진=한경DB
그러나 고유의 가치가 불변하듯, 슈베르트의 작품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현악 4중주곡 '죽음과 소녀', 피아노 5중주곡 '송어'는 물론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 나그네', '아베 마리아' 등 수많은 가곡은 세기의 대작으로 조명받죠. 특히 가곡 영역에서 슈베르트의 존재 가치는 어느 작곡가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는 31년이라는 짧은 생 속에서 600여편의 가곡을 쏟아낸 인물입니다. 주목할 점은 단순히 다수의 작품을 작곡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간 주목되지 않았던 '가곡'이라는 영역을 음악의 주요 예술 형식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입니다.

고전파 시대에서 가곡은 단순히 시의 내용을 잘 전달되도록 하는 부수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슈베르트는 시를 해석하는 독자적인 영역으로서 가곡의 가치를 확대했습니다. 특히 피아노를 이용해 독일 대문호들이 쓴 서정시의 감정을 최대치로 끌어내고자 했던 변화는 가곡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죠. 슈베르트에게 '가곡의 왕'이라는 칭호가 결코 아깝지 않은 이유입니다. 특히 수많은 작품 중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전 세계 어디에서나 한 번쯤 듣게 되는 불후의 걸작으로 자리하죠.

작품의 영감은 19세기 최고의 역사 소설가였던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Walter Scot, 1771~1832)의 서사시 '호수의 여인'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서사시는 스코틀랜드 국경의 귀족들과 왕들의 대립이 잦은 상황 속 기사와 귀족의 딸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아베 마리아'는 주인공 엘렌이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평안을 기도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노랫말입니다. 아버지가 길을 나선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돌아오지 않자 성모 마리아에 기도하는 것으로, 가사에서부터 선율의 표현까지 간절함과 애틋함이 묻어나죠.

명성이 높은 가곡인 만큼 성악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독창회에 올리고 싶은 작품으로 꼽힙니다. 동시에 표현력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갈리는 탓에 개인의 역량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혹독한 작품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유절형식으로 3절의 곡이 연결되는 형태를 띠고 있고, Sehr langsam(매우 느리게) 빠르기로 설정돼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기보단 제한된 감정선에서 최대한 순수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 집중을 요하는 작품입니다. 반복되는 선율에서도 계속해서 청중의 몰입도를 고조시키기 위해 세밀하게 변화하는 표현법을 구사하는 것도 관건입니다. 옆에서 얘기하듯 생동감을 구현하면서도 청중의 공감을 끌어내야 하는 작품인 만큼, 초절기교가 없음에도 곡을 소화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평입니다.

화려하거나 극적인 선율 하나 없이도 약 200년간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연주되는 작품 '아베 마리아'. 차가운 동굴 속 매서운 바람에 몸을 떨면서도 아버지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손꼽아 기도하는 한 소녀와 멀리서 그녀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는 아버지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음악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단조로운 선율 속…아버지에 대한 '애틋함' 표현

작품은 피아노 연주자의 조용한 펼침화음으로 시작됩니다. 물결치듯 넓게 퍼지는 선율과 피아니시모(pp) 셈여림이 어우러지면서 평화로우면서도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죠. 이 작품에서 피아노 전주 부분은 기도하기 위해 무릎 꿇은 소녀의 간절한 마음을 위로하는 부분으로 해석됩니다. 상행하던 피아노 선율이 점차 하행하며 분위기를 가라앉히면 이내 소프라노 연주자의 노랫말이 등장합니다. 아주 청아하고도 아름다운 선율로 청중을 순식간에 압도하죠.
소프라노 조수미가 데뷔 20주년 독창회에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알린 뒤,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를 부르는 모습. 사진 출처=유튜브 'smoothiw'
소프라노 조수미가 데뷔 20주년 독창회에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알린 뒤,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를 부르는 모습. 사진 출처=유튜브 'smoothiw'
"아베 마리아! 자비로운 성도 마리아여!" 눈에 눈물이 고인 가냘픈 한 소녀가 아버지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처음으로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한음 한음 정성을 다해 불러야 하는 위 소절은 음표의 높낮이에 따라 울림이 변화하면서 청중에 숭고하고도 고결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이어 "이 소녀의 기도에 귀 기울여주소서! 그대는 황야에서 들으시나니, 절망 속에서 구원하시나니"라고 내뱉는 부분에서는 미세한 음정 변화로 내재된 간절함과 불안함을 표현합니다.

"그대의 보살핌 아래 우리가 편히 잠들게 하소서, 쫓겨나고 버림받고 매도당할지언정" 소녀가 최대한 차분한 선율로 기도를 이어가려 하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은 감출 수 없다는 듯 붓점 리듬이 드리우면서 긴장감을 형성합니다. 그러다 소녀가 "성모 마리아여! 이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외치는 부분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포르테(f) 셈여림이 나오면서 그간 짓눌러왔던 애틋하고도 서글픈 감정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그 즉시 악상이 변하면서 다시 소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간청합니다. "어머니, 이 아이의 간절함을 알아주소서!" 이는 앞서 나온 가사와 달리 쏟아지는 눈물을 애써 참는 듯 애절한 감정이 표현됩니다. 셈여림 변화로 감정 간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부분이죠. 1절의 마무리를 전하는 "아베 마리아!"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하행하는 선율에서부터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사랑, 애틋함 등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이곳에서 성악가가 전하는 극도의 표현력이 발휘되죠.
소프라노 조수미가 데뷔 20주년 독창회에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알린 뒤,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를 부르는 모습. 사진 출처=유튜브 'smoothiw'
소프라노 조수미가 데뷔 20주년 독창회에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알린 뒤,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를 부르는 모습. 사진 출처=유튜브 'smoothiw'
이렇게 1절이 끝나면 같은 선율의 2절, 3절 연주가 이어집니다. 음정과 리듬은 동일하나 가사의 내용이 상이한 만큼 성악가의 감정 변화에 귀 기울인다면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1절에서 거칠고 황량한 바위에서 드리는 기도가 성모 마리아에 닿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그리고 있다면, 2절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미소로 공허하고 깊은 바위 동굴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없애 달라는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 3절에서는 악령이 아버지와 자신을 덮지 않도록 바라는 마음이 표현되죠.

이윽고 성악가가 마지막 가사 "아베 마리아"를 읊으면, 이를 피아노 연주자가 받아 짧은 후주를 연주합니다. 성악가가 선율을 하향하며 연주를 끝맺으면, 연주자가 점차 속도를 늦추고 소리를 감추면서 저음역으로 사라집니다. 한 소녀의 간절하고도 절실한 기도는 그렇게 조용하고 안정적인 선율로 막을 내립니다.

연주자에 따라서는 독일어로 구성된 3절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라틴어 성모송 가사를 붙인 2절 형식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주로 독일어 가사 대신 어려서부터 성당에서 암송해온 기도문을 붙여 연주해온 데 따른 것입니다. 조수미가 2006년 파리의 샤틀레 극장 무대에서 열린 데뷔 20주년 독창회에서 연주한 작품 또한 2절 형식의 '아베 마리아'로 구성돼 있습니다.

격렬한 악상 표현 하나 없이 인간의 무력함과 불안함, 아버지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온전히 담고 있는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오래전 한 소녀의 기도 내용에 그쳤던 불행이 전 세계를 덮쳐버린 오늘, 그 바람이 지니는 숭고함에 마음 깊은 곳이 저리기만 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550만명 이상의 인구가 사망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수천만명의 인구가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에 주저앉은 우리에게 이제는 따스한 온기가 드리우길. 단순한 일상 회복이 아닌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삶의 동력을 얻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시대가 하루빨리 돌아오길 바랍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