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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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국내 증시에서 순매도 흐름을 보이는 개인과 기관이 미국 종목을 수조원어치 쓸어담고 있다. 미국 주도주가 위기에 강하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증시가 지지부진하자 ‘안전 자산’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새로운 상승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지만, 현지 주도주의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 수준) 부담이 높다는 점은 부정적이다.

21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개인과 기관 합산, 증권사의 자기자본 투자는 제외)의 미국 종목 보유액은 이달 초부터 19일까지 18억1915억달러어치 증가했다. 원화로 환산(20일 종가 1139.4원 적용)하면 2조731억원이다.

국내 투자자의 미국 종목 보유액이 지속적으로 늘긴 했지만 최근 증가세가 더 가팔라졌다. 글로벌 증시는 지난 8월 15일께부터 횡보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이달 19일까지 국내 투자자의 미국 종목 보유액 증가율은 24.7%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 증가율(10.4%)에 비해 2배 이상 높다.

이는 국내 투자자가 최근 한국 증시에서 매도 우위 흐름을 보이는 것과 대비된다. 개인은 이달 초부터 21일까지 유가증권시장에서 1조718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기관은 이달 1027억원어치를 사들였는데 지난 8~9월 팔아치운 물량(7조6982억원)에 비하면 많지 않다.

보유량이 늘어난 미국 종목의 상위권은 대부분 기술주다. 이달 초부터 19일까지 국내 투자자들이 보유량을 가장 많이 늘린 종목은 테슬라로 2448억원어치를 더 사들였다. 이어 애플(824억원), 아마존(652억원)이 뒤를 이었다. 알파벳A도 522억원어치를 추가 매수했다.

이들 투자자는 대통령선거 뒤 당선자가 풀어해칠 경기 부양책 보따리에 주목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테슬라 등 그린산업주가 추가 상승할 가능성도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바이든 후보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한 파리 기후변화 협약에 재가입하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횡보장에서 미국 증시로 자산을 옮기는 건 경제가 불안할 때는 강한 종목이 살아남는다는 걸 봤기 때문”이라며 “곧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미국 증시가 긍정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 기술주가 이미 많이 오른 상태인 건 부담이다. 최근 테슬라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900배가 넘는다. 이를 감안하면 미국 기술주의 이익창출 능력이 앞으로 더 좋아지더라도 주가가 오른다는 보장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실적과 주가 간 괴리를 줄이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60년대 말 미국 기관투자가가 선호했던 ‘니프티피프티(Nifty Fifty)’ 종목의 주가는 1973년을 정점으로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이 시점 이후로도 니프티피프티 종목의 실적 개선세가 지속됐지만 실적과 주가 간 괴리를 줄였을 뿐 주가가 오른 건 아니었다. 니프티피프티에 포함됐던 맥도널드, IBM, 제록스 등의 주가가 1973년 고점을 회복한 건 그로부터 10년 이상 지나서였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미국 하원 반독점소위원회가 지난 6일 반독점행위 관련 보고서를 발표하는 등 규제 가능성이 커진 것도 미국 기술주의 위험(리스크)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