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교수님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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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 < 고려사이버대 총장 president5@cuk.edu >
시계는 고장이 나지만 세월은 고장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벌써 이 지면에 보잘것없는 글을 올린 지 두 달이 됐다. 이제 마지막 원고다. 한경에세이에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적잖이 고민하고 있는데 담당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하나하나 친절히 안내해줬다. 통화하는 중에 내가 글을 잘 못 써서 걱정이라고 했더니 “교수님이잖아요”라는 답변이 무심히 돌아왔다.
사실 교수회의 때마다 당신들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저도 교수니까요”라고 말했던 터다. 게다가 가끔 해외여행이라도 할 때면 출입국 신고서 직업란에 버젓이 교수라고 쓰지 않았던가? 그렇지, 내가 교수인 것이 맞지. 그런데도 “교수님이잖아요”라는 그 말이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귓전을 맴돌았다. 교수니까 당연히 글을 잘 쓸 것이라는 믿음이었을까? 정말 다른 교수들은 모두 글재주가 뛰어난 것일까? 아니면 글쓰기 훈련에 마냥 게을렀던 나만의 자책감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해 자신과 남을 평가한다. 그 기준이 무슨 대단한 황금률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집하며 자기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문제는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과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서로 다를 때가 왕왕 있다는 데 있다. 채근담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말이 나온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가을날 찬 서리같이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 대상이 되는 사람인 ‘대인(待人)’과 ‘지기(持己)’를 떼어내고 줄인 말이 ‘춘풍추상(春風秋霜)’이다. 청와대 비서관실에 이 사자성어로 된 액자가 걸려 명성을 얻기도 했다.
원래의 글을 줄이기 위해 빠졌던 ‘대인’과 ‘지기’가 자기 집을 잘못 찾아간 것일까? 남에게는 찬 서리를 몰아치고, 자신에게는 봄바람을 불어대는 민망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 사실 평가 기준이란 것이 절대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남이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부여하는 기대 수준이 있음을 감안하면 그 정도의 차이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결국 서로 다른 눈높이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이니 ‘이 정도면 잘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는 늘 부족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보통 사회적 지위나 권위가 높을수록 그 사람에 대한 기대치도 덩달아 높아진다. 그것은 단순히 높고 낮음 때문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더 높아진 기준을 충족하기 버겁더라도 억울해하며 불평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하며 그 벽을 넘어야 한다. 현실의 나보다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교수님이잖아요”라는 짧은 답변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내가 무심히 지나쳐버린 우리 사회가 정한 교수에 대한 기준이었겠지. 교수다움의 기준을 돌아보도록 일깨워준 기자가 무척 고마운 이유다.
사실 교수회의 때마다 당신들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저도 교수니까요”라고 말했던 터다. 게다가 가끔 해외여행이라도 할 때면 출입국 신고서 직업란에 버젓이 교수라고 쓰지 않았던가? 그렇지, 내가 교수인 것이 맞지. 그런데도 “교수님이잖아요”라는 그 말이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귓전을 맴돌았다. 교수니까 당연히 글을 잘 쓸 것이라는 믿음이었을까? 정말 다른 교수들은 모두 글재주가 뛰어난 것일까? 아니면 글쓰기 훈련에 마냥 게을렀던 나만의 자책감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해 자신과 남을 평가한다. 그 기준이 무슨 대단한 황금률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집하며 자기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문제는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과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서로 다를 때가 왕왕 있다는 데 있다. 채근담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말이 나온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가을날 찬 서리같이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 대상이 되는 사람인 ‘대인(待人)’과 ‘지기(持己)’를 떼어내고 줄인 말이 ‘춘풍추상(春風秋霜)’이다. 청와대 비서관실에 이 사자성어로 된 액자가 걸려 명성을 얻기도 했다.
원래의 글을 줄이기 위해 빠졌던 ‘대인’과 ‘지기’가 자기 집을 잘못 찾아간 것일까? 남에게는 찬 서리를 몰아치고, 자신에게는 봄바람을 불어대는 민망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 사실 평가 기준이란 것이 절대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남이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부여하는 기대 수준이 있음을 감안하면 그 정도의 차이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결국 서로 다른 눈높이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이니 ‘이 정도면 잘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는 늘 부족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보통 사회적 지위나 권위가 높을수록 그 사람에 대한 기대치도 덩달아 높아진다. 그것은 단순히 높고 낮음 때문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더 높아진 기준을 충족하기 버겁더라도 억울해하며 불평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하며 그 벽을 넘어야 한다. 현실의 나보다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교수님이잖아요”라는 짧은 답변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내가 무심히 지나쳐버린 우리 사회가 정한 교수에 대한 기준이었겠지. 교수다움의 기준을 돌아보도록 일깨워준 기자가 무척 고마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