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교수님이잖아요"
시계는 고장이 나지만 세월은 고장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벌써 이 지면에 보잘것없는 글을 올린 지 두 달이 됐다. 이제 마지막 원고다. 한경에세이에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적잖이 고민하고 있는데 담당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하나하나 친절히 안내해줬다. 통화하는 중에 내가 글을 잘 못 써서 걱정이라고 했더니 “교수님이잖아요”라는 답변이 무심히 돌아왔다.

사실 교수회의 때마다 당신들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저도 교수니까요”라고 말했던 터다. 게다가 가끔 해외여행이라도 할 때면 출입국 신고서 직업란에 버젓이 교수라고 쓰지 않았던가? 그렇지, 내가 교수인 것이 맞지. 그런데도 “교수님이잖아요”라는 그 말이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귓전을 맴돌았다. 교수니까 당연히 글을 잘 쓸 것이라는 믿음이었을까? 정말 다른 교수들은 모두 글재주가 뛰어난 것일까? 아니면 글쓰기 훈련에 마냥 게을렀던 나만의 자책감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해 자신과 남을 평가한다. 그 기준이 무슨 대단한 황금률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집하며 자기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문제는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과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서로 다를 때가 왕왕 있다는 데 있다. 채근담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말이 나온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가을날 찬 서리같이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 대상이 되는 사람인 ‘대인(待人)’과 ‘지기(持己)’를 떼어내고 줄인 말이 ‘춘풍추상(春風秋霜)’이다. 청와대 비서관실에 이 사자성어로 된 액자가 걸려 명성을 얻기도 했다.

원래의 글을 줄이기 위해 빠졌던 ‘대인’과 ‘지기’가 자기 집을 잘못 찾아간 것일까? 남에게는 찬 서리를 몰아치고, 자신에게는 봄바람을 불어대는 민망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 사실 평가 기준이란 것이 절대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남이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부여하는 기대 수준이 있음을 감안하면 그 정도의 차이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결국 서로 다른 눈높이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이니 ‘이 정도면 잘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는 늘 부족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보통 사회적 지위나 권위가 높을수록 그 사람에 대한 기대치도 덩달아 높아진다. 그것은 단순히 높고 낮음 때문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더 높아진 기준을 충족하기 버겁더라도 억울해하며 불평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하며 그 벽을 넘어야 한다. 현실의 나보다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교수님이잖아요”라는 짧은 답변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내가 무심히 지나쳐버린 우리 사회가 정한 교수에 대한 기준이었겠지. 교수다움의 기준을 돌아보도록 일깨워준 기자가 무척 고마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