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등거리 외교 성공비결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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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등거리 외교로 동아시아 세계의 강국이 된 고려
고려, 등거리 외교 및 무역활동 활발
요나라와 송나라의 갈등 속 성장
원나라 출범과 함께 결국 한계점
고려, 등거리 외교 및 무역활동 활발
요나라와 송나라의 갈등 속 성장
원나라 출범과 함께 결국 한계점

북한·중국·일본·미국 문제 등 모든 외교 정책에서 갈팡질팡하고, 민족의 운명도 불확실한 상황이다. 역사에서 효율적이고, 성공했던 나라의 외교정책은 현재 한민족에게 큰 지침이 될 수 있다.
고려는 산업과 무역을 바탕으로 경제력과 문화가 뛰어났으며, 국제적인 나라였다. 우리는 고려가 정치적인 위상과 역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모른다. 불가사의하다.
동아시아 지역 갈등과 고려
고려 500년 동안에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요나라·송나라·서하·금나라·원나라(몽골)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면서 흥망을 거듭했다. 일본 또한 내부갈등으로 혼란이 끝없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유동적이고, 전쟁으로 점철된 국제질서 속에서 고려를 성공시킨 외교정책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현재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중국 지역이 통일되면 주변의 모든 나라는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내부갈등을 자제한다. 간섭과 복종, 지배를 추진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은 한민족의 분단, 통일, 경제문제, 심지어는 과거 역사까지 사사건건 간섭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는 중국의 분열을 원하고, 의도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분열을 조장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물론 조선 같은 예외도 있지만.
요나라와 송나라의 갈등과 고려의 등거리 외교 및 무역활동
![고려의 등거리 외교 성공비결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https://img.hankyung.com/photo/202007/01.23180445.1.jpg)
동아시아의 지정학적인 환경을 고려하면 만주지역의 통일국가와 중국은 대립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국가들은 이러한 역학관계와 변화상황에 예민했다. 마오쩌둥이 6.25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유는 한민족의 영구분단이란 목표와 함께 만주를 완벽하게 중국질서로 편입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960년에 건국한 송나라는 치열한 통일전쟁을 벌이는 한편 대요 포위전선의 구축이 절박했다.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하류에 세운 정안국(938~986년)과 동맹(970년)을 맺고, 군사용 말을 수입할 정도였다.
요나라는 배후가 되는 고려를 우호세력으로 만들 필요 때문에 사신을 계속 파견해 국교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국경선을 접한 요나라와는 불편한 관계였으나, 요나라를 배척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송나라는 문화와 경제, 무역을 중시하는 국가였고, 황해로 인해 군사적인 충돌의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요나라에 대항해 송나라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송나라는 고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려와 요의 관계를 의심해 외교의 중단이라는 파국상태까지 이르렀다. 이 때 특사형식으로 바다를 건너가 송태조를 설득해서 7년 동안 단절된 외교관계를 복원시킨 인물이 젊은 서희(942~998년)다.

이처럼 11세기 후반에 동아시아 역학관계는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놓고 치열한 외교전과 군사전을 펼쳤다. 고려와 북방의 요나라, 중국 지역의 송나라, 몽골 지역의 서하를 주축으로, 만주 일대의 여진, 일본 등의 주변 세력들이 이합집산했다.
고려는 송과 요나라의 갈등을 적절하게 활용해 철저한 등거리 외교를 실시하면서 다양한 이익을 챙겼다. 북송 시대인 약 160여 년 동안에 고려는 송에 57번, 송은 고려에 30번의 사신을 보냈다. 평균 2년에 1번 꼴로 이뤄진 밀접한 외교였다. 대문장가인 소동파는 황제에게 고려를 경계하고, 고려사신들을 들이지 말라고 강한 어조로 상소했다. 심지어는 고려 사신들이 군사적 허실을 살피므로, 잠재적인 위협을 끼친다고 적대국처럼 표현했다. (윤명철, 《한국해양사》)
송나라와 금나라의 충돌과 고려의 등거리 외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끝까지 송과 금나라의 충돌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철저한 등거리 외교로 평화와 이익을 챙겼다. 고려는 일본과도 교섭을 벌여 통일한 직후인 937년부터 몇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교섭은 활발하지 않았다. 12세기 후반부터 무신정치가 시작되면서 전쟁 등의 갈등 때문에 고려에게는 위협적이지 못했으며, 국제적으로도 전략적인 가치가 약했다. 다만 유구국(오키나와)은 무역 상대로서 가치가 있었다.
고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양을 중시하며, 무역정책을 권장해 경제적으로 성공한 송나라를 활용해 산업과 상업을 발달시켰다. 또한 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무역망에 진입해서 국부를 증대시켰고, 세계질서에 눈을 떴다. 특히 유학을 비롯해서 문인화와 시·도자기 등의 예술, 불교 등을 수입해서 문화를 성숙시키는데 활용했다. 하지만 송나라의 지나친 문치주의는 훗날 고려사회가 약화되고, 멸망하는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 잔재는 오랫동안 한민족의 세계관과 외교정책의 기조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고려의 외교정책이 주는 의미

질문을 던져본다. 남·북한의 적대관계와 강력한 통일중국의 급팽창, 재부상에 성공하는 일본, 미·중 간의 심각한 갈등, 정체성의 상실. 이렇게 위기로 가득 찬 불확실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고려의 외교정책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