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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 역사를 ‘라인강의 기적’에 빗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독일은 경제와 정치 등 여러 면에서 한국의 롤모델로 꼽혀 왔다. 그동안 독일 통일과 일자리 모델 등 단편적 사례는 많이 소개됐지만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패배 후 채택한 경제정책의 이론적 토대와 세부 내용은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책마을] 라인강·한강의 기적…그 뒤엔 '질서자유주의' 있었다
《한국 경제의 기적과 환상》은 독일에서 유학한 13명의 국내 학자가 독일의 질서자유주의를 중심으로 소득주도 성장, 경제민주화, 독점 규제, 노동조합, 가업 승계, 중소기업, 금융자유화, 국민연금, 재정준칙, 지방분권 등 10가지 분야의 현안에 대해 독일과 한국을 비교한 책이다. 김상철 한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최종태 서울대 경영대학 명예교수 등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질서자유주의는 독일 경제학자 발터 오이켄이 2차대전 후 독일이 나아가야 할 경제적 방향으로 제시한 이론이다. 경제에 관한 국가의 역할을 질서정책과 과정정책으로 구분해 규정한다는 게 핵심이다. 질서정책이란 시장에서 경쟁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경제정책이다. 과정정책은 ‘게임의 결과’를 개선하거나 변경하기 위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간접주의 정책이다.

질서자유주의는 정부가 장기적인 안목의 질서정책에 한정해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정책을 시행할 때는 시장에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들은 한강의 기적을 이끈 한국 경제정책의 중심에는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의 질서자유주의가 있다고 설명한다. 한국 정부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기업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양질의 인적 자원을 공급하기 위해 교육환경을 개선했고, 개별 기업이 개발하기 어려운 기술을 국책연구기관에서 개발해 보급했다.

비록 일부 기업에 특혜로 작용한 측면도 있지만 이는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지적한다. 물질 자원이 절대 부족했던 상황에서 내수가 아니라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을 택한 한국 정부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재정준칙을 엄격하게 확립한 것 또한 오늘날 국가부채를 양호하게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설명한다.

책은 질서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 준 교훈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 번째는 질서의 상호의존성이다. 경제질서와 법질서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시장이 자생적으로 건전하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과정정책이 아니라 질서정책을 우위에 둔다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이나 특정 계층, 산업을 우대하거나 차별해선 안 되고 중립적인 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헌법주의다. 헌법을 통해 국가권력을 적절히 제한하면서 시장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가장 우려한 부분은 무지와 권력 남용이다.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포퓰리즘 정책을 무차별적으로 남발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확대, 중산층의 몰락, 가계부채 증가, 소득 양극화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과거를 비난해선 안 된다고도 지적한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은 콘라트 아데나워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독일 총리가 채택한 질서자유주의적 노선을 충실히 반영한 경제정책으로 경제발전 원동력을 키웠다고 이 책은 평가한다. 과거 30년간 한국의 고도성장 경험이 제3세계 국가에 바람직한 모델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설명한다. 1960년대 독일로 간 한국 광부와 간호사, 돈을 벌기 위해 중동의 건설현장으로 갔던 1970년대 건설노동자를 예로 들며 이 같은 역사를 홀대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소득주도형 경제성장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 따른 부작용으로 경제성장과 소득분배가 모두 악화됐다고 지적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위기로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경제정책의 원칙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경제를 회복시키겠다는 다짐이 환상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책은 던지고 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