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가에는 코를 막고 담요로 온몸을 감싼 사람이 아래를 응시하며 서 있다.
바로 옆 외벽과 창문을 따라선 불길이 넘실대며 위협한다.
표정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지만, 창가에 선 이의 얼굴에 공포가 서려 있다.
1971년 12월 25일에 발생한 건국 이후 최악의 화재로 알려진 대연각호텔 화재 때 사진이다.
사진에는 "25일 오전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는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불이 나 투숙객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란 설명이 붙어 있다.
당시 합동통신(연합뉴스 전신) 기자로 이 사진을 촬영한 배정환(77) 작가는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국회에서 야근하고 아침에 장충동 집으로 갔는데 불이 났다는 연락이 와서 바로 출동했어요.
갔더니 불이 솟고 연기가 막 나고 난장판이에요.
침대 매트를 붙들고 뛰어내리고, 헬기에서 내려준 줄에 매달리기도 했는데 산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고 그랬죠."
사진 속 인물은 당시 중국 외교관이었다고 한다.
배 작가는 "7층인가 8층 창가에서 담요를 두르고 서 있었어요.
수건을 물에 적셔 입에 물고 있었다는데 사람들이 뛰어내리지 말라고 소리쳤죠. 다행히 나중에 구출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라고 회상했다.
이날 오전 9시 50분께 서울 중구 대연각호텔 2층 카페에서 LPG 가스통이 폭발했다.
불꽃이 튀며 가스레인지에 불이 옮겨붙었고, 카펫과 목조 시설물을 태우더니 결국 지상 21층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불을 끄기 위해 서울 시내 모든 소방차가 동원됐지만, 불은 거센 바람에 고층까지 삽시간에 번졌다.
결국 육군 항공대와 공군, 미8군으로부터 헬리콥터를 지원받았고, 발화 8시간 만인 오후 5시가 돼서야 불을 끌 수 있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객실 222개에 묵었던 내외국인 163명이 불에 타 숨지거나 질식사 또는 추락사했고, 부상자는 63명에 달했다.
총피해액은 8억5천만원으로 추산됐다.
출동 인력과 동원 장비를 보면 이날 화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소방청에 따르면 총 출동 인력은 1천923명으로 소방관 528명, 경찰관 737명, 군인 115명, 구청직원 400명, 의용소방대 113명, 병원 관계자 30명 등이었다.
소방차 52대, 구급차 15대, 헬기 10대, 경찰차 9대 등 동원 장비는 86대였다.
피해가 컸던 것은 LPG 가스용기가 실내에 보관돼 있었고, 화재경보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스프링클러도 설치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배관이 불이 잘 번지는 비닐로 제작돼 있었다.
이날 참사 이후 화재 경보설비에 대한 전면적인 점검이 이뤄졌고,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화재는 지금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겨울철에 대형화재가 잦다.
최근 발생한 큰 화재로는 지난해 1월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46명 사망, 109명 부상)와 2017년 12월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29명 사망, 40명 부상)가 있다.
2008년 1월 경기 이천 냉동창고 화재(40명 사망, 10명 부상)도 참혹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