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프카디오 헌의 단편소설집 <골동기담집>의 띠지를 바꾸기 전(왼쪽)과 후 모습.  /허클베리북스 제공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소설집 <골동기담집>의 띠지를 바꾸기 전(왼쪽)과 후 모습. /허클베리북스 제공
‘사실은 (일본 작가가 아니라) 영국 작가 책입니다. 라프카디오 헌 띵작(명작)!’

출판사 허클베리북스가 지난달 12일 출간한 <골동기담집>에 새로 씌운 띠지 내용이다. 기존 띠지에 있던 ‘일본 환상문학의 전설적 명저’라는 문구는 ‘일본 상품 불매운동 방지용 특별커버’로 대체됐다. 출판사에 따르면 이 책의 저자인 고이즈미 야쿠모는 1850년 영국에서 태어난 라프카디오 헌이다. 그는 1890년 일본에 건너가 1896년 귀화했다.

반기훈 허클베리북스 대표는 “최근 불거지고 있는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자칫 책 판매에 영향을 줄 수 있어 띠지를 긴급 교체했다”며 “저자가 귀화한 영국계 일본인임을 숨길 생각이었다면 표지 갈이를 해 저자명을 영문 이름으로 바꿨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소설 판매량 감소세

지난달 1일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이후 국내에서 촉발된 일본 제품 불매운동 여파가 출판계로 번지고 있다.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 제외 조치 이후 더 확산되는 양상이다. 이는 최근 일본 서적 판매량 추이에서도 나타난다. 7일 인터파크도서가 자사 온라인서점 판매량을 집계한 결과 지난달(7월) 일본 소설 판매량은 6월 판매량에 비해 7.4% 감소했다. 7월 마지막 주 판매량 역시 6월 마지막 주에 비해 약 25% 줄었다. 지난해 7월 일본 소설 판매량이 전달 대비 16% 증가했던 것과 상반된다. 스테디셀러인 야쿠마루 가쿠의 <돌이킬 수 없는 약속> 7월 판매량은 6월 대비 6% 감소했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22% 줄었다.

이화종 인터파크 문학 MD는 “반일 정서와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일본 소설 판매량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출판사들의 일본 서적 관련 마케팅 활동도 올 상반기보다 소극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일본 서적 출간 연기 잇따라

일부 출판사는 일본 작가들이 쓴 책의 출간을 연기하고 일본 작가 방한까지 취소했다. 지난달 초 일본에서 ‘천재 편집가’로 불리는 미노와 고스케가 쓴 <미치지 않고서야>를 출간한 21세기북스는 최근 작가 방한 행사를 취소했다.

박선영 21세기북스 대표는 “서점들도 일본 책 노출을 꺼리는 분위기라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채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로 호평받은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 방한 초청 행사를 연기했다. 마음산책은 일본 평론가 쓰노 가이타로의 <독서와 일본인> 출간을 연기했고, 은행나무도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 10주년 기념판 출간을 미뤘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독도 영유권이나 교과서 왜곡 문제와 달리 이번 사태는 한·일 관계에 대한 근본적 문제로 시작된 갈등”이라며 “획기적인 상황 변화가 있기 전까지 일본 서적 출간과 관련한 출판사들의 마케팅은 상당히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일 등 일본 다룬 역사서 주목

반면 반일 문제 등 일본을 다룬 역사서와 교양서는 출판가에서 새로 주목받고 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반일종족주의>는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이달 들어 교보문고 정치·사회 분야 판매 1위에 올랐다. 아오키 오사무 전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이 아베 신조와 내각 각료 19명 중 15명이 속해 있는 조직 ‘일본회의’의 실체를 파고든 <일본회의의 정체>는 일본인이 쓴 책인데도 불구하고 교보문고 정치·사회 분야 7위에 랭크됐다.

역사·문화 분야에서도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가 9위에 새로 진입했다. 주일대사관에서 근무한 전직 외교관 신상목 씨가 쓴 이 책은 일본 근대화 성공에 기여한 에도시대에 주목한다. 에도시대에 어떻게 근대화의 맹아가 태동하고 선행조건들이 충족됐는지 살펴본다. 정종현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가 식민지 조선과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사법·행정·경제계를 장악한 엘리트의 뿌리를 추적한 <제국대학의 조센징>도 역사·문화 분야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올랐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