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드라마 등 영향 미미…공연·전시 국내 반일감정 주시 일본 정치·사회·역사 관련 서적 출간·판매 늘어
문화부 =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조치로 격화한 한일 외교 갈등이 문화예술 등 민간분야의 교류 단절로 번지지 않을지 문화예술계에서도 동향을 예의주시한다.
특히 과거처럼 일본 내 혐한(嫌韓), 반한(反韓) 여론이 확산하면 최근 수년 만에 되살아난 일본 내 한류 열풍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3일 일본 정부와 극우 보수단체의 압력으로 일본 국제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포함된 기획전이 사흘 만에 중단되면서 이 같은 우려가 현실화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일본 시민단체와 문화예술계의 움직임은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국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는 일본 정부나 극우 성향 언론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국내 문화예술계는 일본과의 기존 교류 사업을 지속하는 한편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간소화 혜택 대상)에서 제외한 일본 정부 조치를 전후해 높아지는 한국 내 반일(反日), 혐일(嫌日) 기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 "일본 내 한류 아직은 별 영향 없어" 도쿄 주재 황성운 주일한국문화원장은 5일 "한류 등 문화교류는 현재까지 별 영향이 없다"며 "아직은 정치와 문화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일본 시민이 많다"고 전했다.
7월 방탄소년단 일본 공연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지난주 한국문화원 영화상영회도 평소와 다름없이 잘 끝났다고 했다.
일본 공영방송인 NHK는 정치 상황에도 한일 문화교류가 지속하고 있다면서 한국문화원의 영화상영회와 한일축제한마당 준비 상황을 취재하고, 도쿄 신주쿠 한인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의 한국어학교에서 진행 중인 한일교류회도 소개했다고 한다.
도쿄에 거주하는 40대 재일교포 박 모 씨는 아이치 트리엔날레 소녀상 전시 중단에 대해 "사태가 이렇게 돼 정말 아쉽지만, 나고야 시장이 시작한 일이니 일본 작가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시기에 소녀상 전시를 시작한 일본 작가들 역시 일본 상황을 보여주는 거라 생각한다.
일본 정부와 매스컴에선 계속 떠들지만 일반인들은 무관하게 느낀다"고 말했다.
실제로 소녀상 전시가 중단될 것이란 소식이 전해지면서 지난 주말 아이치(愛知)현 전시장은 인파로 크게 붐볐다.
일본펜클럽은 전시를 지속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으며, 일본 시민단체들이 전시장 밖에서 전시 중단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일 관계가 지속해서 악화한다면 일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란 예상이 많다.
과거 10년간 지속하면서 정점에 오른 일본 한류는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과거사에 대한 일왕 사과 요구 후 일본 내 혐한, 반한 여론이 고조되면서 급격히 식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황 원장은 "한국의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나 부산시의 교류 중단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한국 여행이 안전하냐는 문의가 늘고 단체 관광 예약도 주춤하다"며 "반일 시위 모습이 계속 보도되면 분위기가 악화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 일본 외무성은 지난 4일 한국에서 반일 시위가 빈발하는 점을 거론하며 자국민에게 한국 여행시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다.
◇ K팝 일본 내 영향 미미…국내 반일감정에 일본 관련 노출 자제 과거 한일관계 경색으로 인한 한류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국내 가요계는 일본의 경제보복 여파를 예의주시하면서도 당장 K팝 가수들의 활동에 지장을 주진 않을 것으로 본다.
예정한 대규모 현지 공연과 투어는 성황리에 진행됐고, 줄줄이 발표된 공연 일정과 음반 출시에도 별다른 영향은 감지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의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발표가 있던 지난 2일에도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를 비롯해 엑소, 레드벨벳 등 소속 가수가 대거 일본으로 출국했다.
이들은 3~5일 도쿄돔에서 합동 공연 'SM타운 라이브 2019 인 도쿄'를 3회 펼쳤다.
앞서 방탄소년단이 지난달 총 4회의 스타디움 투어를 매진시키며 총 21만 팬과 만났고, 위너도 지난달부터 월드투어를 순조롭게 진행 중이며 7일 앨범도 낸다.
또 한일 멤버로 구성된 아이즈원은 21일부터 일본 4개 도시 공연을, 트와이스는 10월부터 7개 도시 아레나 투어를, 세븐틴은 10~11월 월드투어 일본 공연을 연다.
블랙핑크도 9월 앨범을 내고 12월부터 돔투어를 진행한다.
기획사와 음악 관계자들은 일본과는 오랜 기간 한류와 반한이 공존한 가운데 교류를 축적해 K팝의 뿌리가 견고한 편이고, 이를 소비하는 10~20대는 정치 갈등과 문화 교류를 별개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방탄소년단 지민의 광복 티셔츠 논란에서 봤듯이 일본 혐한 세력의 공격은 경계하는 분위기다.
이보다 국내 팬들 사이에서의 반일 감정 확산 여부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운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 등을 고려해 연예인들은 일본 방문과 관련한 노출을 자제하는 모습이다.
배우 이시언에 이어 그룹 SS501 출신 연기자 김규종이 일본인 여자 친구와 일본 등지에서의 데이트 사진을 올렸다가 뭇매를 맞았다.
트와이스와 아이즈원 등의 일본 국적 멤버를 퇴출하자며 적대감을 드러낸 이들도 있었지만, 이는 미성숙한 태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 한일 드라마 상호 리메이크 예정대로 방송가도 한일 상호 작품 리메이크 등이 활발하게 이뤄진 터라 차질이 생길지 않을까 사태를 주시하지만, 눈에 띄는 영향은 아직 없는 상태다.
현재 방영 중인 채널A 금토극 '평일 오후 세시의 연인'이 일본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며, SBS TV 금토극 '의사요한'도 일본 소설 구사카베 요 '신의 손'을 바탕으로 했다.
두 작품 모두 이미 첫발을 뗀 상황이어서 방송에는 지장이 없고 시청률도 이렇다 할 변동은 없다.
최근에는 한국 작품을 리메이크한 일본 드라마가 더 많은 편이다.
MBC TV '투윅스', SBS TV '싸인', OCN '보이스'가 리메이크 명단에 올라 제작을 예고했거나 이미 방송 중이다.
대부분 이미 판권 계약이 완료되거나 제작에 돌입한 상태여서 당장 한일 외교갈등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방영 중인 '싸인'은 한국 리메이크작 중에 가장 성공작으로 꼽힌 '굿닥터'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SBS는 전했다.
한 지상파 드라마국 관계자는 "계약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당장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진 않지만, 향후 (상황) 변화에 대한 걱정은 좀 있다"라고 말했다.
◇ 공연계, 국내 반일감정 주시…항일 주제 작품 큰 호응 현재로선 일본 내 반한 기류보다는 한국 내 반일 감정이 양국 교류에 더 큰 변수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지난달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아디오스 피아졸라, 라이브 탱고' 공연에선 당혹스러운 장면이 연출됐다.
일본의 탱고밴드 '콰트로시엔토스' 연주 순서에서 한 관객이 "쪽바리!"라고 외친 뒤 공연장 밖으로 사라진 것. 예술의전당에선 오는 24일 리사이틀홀에서 일본 플루티스트 유키 고야마 독주회가 예정돼 있는데 주최 측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다.
지난달 말 일본 출신 더블 베이시스트 미치노리 분야가 연주한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공연 때도 주최 측은 긴장감을 드러냈으나 공연은 무사히 마쳤다.
뮤지컬계에선 확산하는 반일 정서에 편승해 항일 독립운동과 저항정신을 그린 작품이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다.
안중근 일대기를 그린 창작 뮤지컬 '영웅'은 공연예술통합전산망 7월 통계에서 월간 유료 예매율 2위를 차지했다.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삶을 그린 창작 음악극 '극장 앞 독립군'도 관심을 모은다.
일본 관객의 국내 뮤지컬 관람 추세는 별다른 변동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일본 관객들은 특정 배우에 대한 충성도 높은 편이어서 사드 문제로 '난타' 공연 단체 관람을 취소한 중국 관객들과는 차이가 있다는 분석이다.
공연계 관계자는 "김준수 등 일본에서 인기 있는 배우가 출연하는 팬덤형 작품은 큰 영향이 없고 정치적 이슈에 흔들지 않을 것으로 본다"며 "다만 한일관계 경색이 장기화하면 우리 뮤지컬이 가장 큰 해외 시장인 일본 진출에 타격이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 미술전시 일본 작가 기피…문화재 교류행사 무산 국내 미술시장에서도 높아진 국내 반일 감정으로 인한 영향이 감지된다.
한국화랑협회에 따르면 오는 9월 말 코엑스에서 예정된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참가 갤러리 중 한 곳이 구사마 야요이(草間彌生) 대신 다른 국내 작가 작품을 걸겠다고 통보했다.
구사마는 일본 미술작가 중 가장 비싼 작품가를 자랑하며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갤러리는 이번에 그룹전을 준비하면서 일본 작가를 러시아 작가로 막판 변경했다.
국내에서는 한·중·일 작가를 함께 모아 소개하는 전시가 잦았던 만큼 양국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어떠한 식으로든 전시 기획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일본 화랑가에서는 양국 갈등 여파가 별달리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다.
일본 출장 중인 한 미술계 인사는 "갤러리들과 만나 한일 이슈를 먼저 꺼내 보아도 별 반응이 없고 화제가 되지 못한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문화재계에서도 영향이 없지 않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말 한일관계를 고려해 조선통신사선 재현선 쓰시마섬 행사 참가를 취소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양국 우호 상징인 조선통신사선 재현선 복원에 성공했고, 이달 초 일본 쓰시마섬 이즈하라(嚴原)항 축제에서 승선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었다.
◇ 일본 관련 서적 출간·판매 늘어 한일 갈등으로 일본 정치, 사회,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서점가에선 관련 서적 출간과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
일본 우경화와 과거사 인식의 퇴행을 비판하는 대담집인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의 '책임에 대하여'을 비롯해 일본 제국의 쇠망을 다룬 존 톨런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 일본 사회를 비판하는 우치다 타츠루의 '대세를 따르지 않는 시민들의 생각법' 등이 최근 출간됐다.
정혜경의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등 일제 강제동원과 관련된 책도 줄을 잇고 있다.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등이 쓴 '반일 종족주의'는 7월 마지막 주 교보문고가 집계한 정치사회 부문 베스트셀러 1위로 올라섰다.
반일을 선(善)으로 여기는 종족주의가 한일 관계를 악화시킨다는 내용이다.
예스24에 따르면 '사쿠라 진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국화와 칼' 등 과거 출간된 일본 관련 서적도 판매가 3~6배 급증했다.
'아베는 누구인가', '영속패전론', '속국 민주주의론' 등은 뒤늦게 관심을 끌고 있다.
반면 평소 인기 있던 일본 소설은 국내 반한 기류를 의식해 출간일을 예정보다 늦추는 출판사가 늘고 있다.
출판계 관계자는 "솔직히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출판사들이 일본 소설 출간을 앞두고 눈치를 보는 중"이라며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여서 어느 출판사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소나기는 피해가자는 심정으로 출간일을 늦춘 곳이 꽤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