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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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미국 통신업계는 대형 인수합병(M&A) 건으로 크게 들썩였다. T모바일이 스프린트를 흡수합병할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두 회사 간의 합병 추진은 일전에도 몇 차례 논의된 적이 있었다. 다만 시장에서는 대부분 오랜 기간 더 높은 실적을 내오던 스프린트가 T모바일을 인수하는 형태를 예상하던 중이었다.

업계 1, 2위인 버라이즌과 AT&T에 밀려 있던 T모바일은 지난 몇 년간 비약적인 발전상을 보이고 있다. T모바일 주가는 지난 5년간 125% 상승했다. 이 기간 동안 버라이즌과 AT&T 주가는 보합 수준이었고 스프린트는 되레 30% 빠졌다. 만년 4위이던 T모바일은 2015년 비로소 업계 3위에 오른 뒤 스프린트와의 격차를 꾸준히 벌려 나가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존 레저 최고경영자(CEO)를 T모바일의 폭발적 성장세를 이뤄낸 주역으로 꼽는다. 2012년 9월부터 T모바일의 CEO를 역임하고 있는 그는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장발과 가죽재킷 그리고 T모바일 로고가 커다랗게 그려진 핫핑크색 셔츠를 고수하고 있어 업계 내에서는 ‘괴짜’로 통한다. 평생 동안 이동통신업계에 몸담아온 레저 CEO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미국 이통사 시장의 판을 뒤집어엎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사와 나는 하나”…모든 일상이 회사 마케팅

레저 CEO에게 있어 T모바일은 생활 그 자체다. 매순간 자기 자신을 회사 브랜드 마케팅의 최전선에 내세우고 있다. 공식 석상에 설 때나 개인 활동을 할 때나 항상 T모바일 옷을 입는다. 주말이면 회사 홍보 차원에서 페이스북 스트리밍을 통해 요리 강연을 한다. 강연 중에도 옷은 항상 T모바일 셔츠를 입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최근 몇 년간 요리 강연에서 다룬 레시피를 모아 책으로 출간해 수익금 전부를 회사 명의로 기부했다.

간혹 경쟁사를 과하게 ‘디스’(깎아내려)해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지난해 2월 온라인에 게재한 동영상에서 버라이즌과 AT&T를 ‘공갈쟁이들(Bullshit)’이라 불러 법정 공방까지 갔다.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한 설전도 즐긴다. 한때 또 다른 ‘트위터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T모바일 서비스를 비판한 것과 관련해 레저가 그와 몇 시간에 걸쳐 ‘트윗 전쟁’을 벌인 일은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무약정 서비스, 이동통신업계 뒤집어엎다

범상치 않은 외모와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레저 CEO가 탁월한 수완을 겸비한 사업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T모바일 CEO가 된 직후인 2013년 무약정 이동통신 서비스인 ‘언캐리어(Un-carrier)’ 전략을 시도했다. 다른 이통사들이 고객들과 장기 계약을 맺는 데 집중하는 것과 정반대 노선을 택한 것이다. 그 외에도 6개월 주기의 단말기 교체 서비스, 100개국 무료 데이터·문자 로밍 서비스를 업계 최초로 시장에 내놨다. 얼마 전에는 월 40달러(약 4만5300원)만 내면 미국 전역에서 무제한 LTE뿐만 아니라 넷플릭스까지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요금제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현재 미국 이통사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무약정 이동통신 서비스는 6년 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레저 CEO는 인터뷰에서 언캐리어 전략에 대해 묻는 질문에 “언젠가 모든 이통사가 우리를 따라 하게 될 것이라 믿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AT&T가 미디어그룹인 타임워너를 인수한 것도 T모바일의 언캐리어 전략 공세로 인해 악화된 수익성을 보전하기 위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에는 올해 출시 예정인 5세대(5G) 이동통신 서비스를 기존 4G 서비스와 똑같은 가격에 제공하겠다고 밝혀 시장에 또 한 차례 파장을 일으켰다. 타사들 사이에서 5G 서비스 가격 산정 방식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선제적으로 시장을 뒤흔든 것이다.

시장은 파괴, 고객과 직원들은 최고로 대접

시장 파괴를 즐기는 레저 CEO의 경영 철학은 고객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는 매너리즘의 수렁에 빠져 있던 삼류 이통사를 일류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2년 당시 몇 년째 3300만 명대를 유지하고 있던 T모바일 이용자 수는 7년 사이 800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같은 기간 매출도 두 배를 넘겼다. 경쟁사 모두가 매출 하락을 겪고 있는 와중에 이룬 쾌거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CEO는 “레저의 염가 전략은 휴대전화로 스트리밍 동영상을 시청하는 이용자가 많아지고 있는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포착해낸 것”이라 평가했다.

T모바일은 비전통적인 판촉 행사로 유명하다. 매주 화요일이면 고객들을 대상으로 피자, 밀크셰이크, 영화 대여를 공짜로 제공하거나 할인권을 선물하고 있다. 2016년 6월부터 시작한 프로모션이 3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T모바일이 새로운 서비스를 발표하는 날이면 레저 CEO가 직접 행사장을 찾아 고객들과 사진을 찍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고객의 행복만 챙기는 것은 아니다. 직원들이 유쾌한 직장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T모바일 직원들에게 있어 분기 실적 발표일은 ‘축제의 장’이다. 직원들은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음식을 즐기면서 레저 CEO의 실적 발표를 경청한다. 어떤 실적이 나오더라도 서로를 격려하는 자리가 되고 있다. 레저 CEO는 매년 회사 직원 전원과 최소한 한 번 이상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60세 넘어서도 마라톤 즐기는 열정의 사나이

레저 CEO는 올해 만 60세가 됐지만 여전히 열정을 이어가고 있다. 늦은 나이에도 마라톤을 즐기는 체육광이다. 젊은 시절 체육 교사가 꿈이었다고 한다. 일요일마다 요리 강습 스트리밍도 계속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상 그의 프로필에는 ‘T모바일 CEO이자 전문 요리사’라고 적혀 있다. 한때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직원들과 고객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입을 다물고 그들이 원하는 걸 해줘라”라고 말하곤 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업계 전체에 전파하기 위한 설교와 도발을 계속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동통신업계는 내가 제일 잘 안다”며 “그들은 좀 더 많은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연일 기자 ne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