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통상당국이 한국 공정거래위원회의 미국 기업에 대한 불공정행위 조사 때 “충분한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양자 협의를 요청했다. 미국이 자국 기업의 방어권 보장을 요구한 적은 있었지만 이를 내세워 FTA 협의까지 요청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 정부는 공정위가 2016년 통신칩 제조회사 퀄컴에 역대 최대 과징금(1조300억원)을 부과한 것을 미국 측이 문제 삼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공정위는 “미국 기업의 방어권을 보장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美 기업 방어권 보장 안 돼”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15일 홈페이지를 통해 “미 정부는 한·미 FTA 제16장(경쟁 관련 사안)에 따라 이날 한국에 협의를 요청했다”며 “공정위의 일부 심리가 미국 이해당사자에게 불리한 증거를 검토하고 반박할 기회를 포함한 특정 권리를 보장하지 않은 채 열렸다”고 주장했다. USTR은 “협의를 통해 한국 공정위가 경쟁법 위반 여부를 가리기 위해 진행한 심리와 관련한 우려를 해소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USTR이 공정위가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한·미 FTA 조항은 16장의 1조 3항이다. 이 조항은 ‘경쟁법 위반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행정 심리에서 피심인이 자신을 방어하는 증거를 제시하고 발언할 기회를 부여받도록 보장한다’고 돼 있다.

USTR은 그동안 한국 측과 여러 번 회의를 하고 서한 교신 등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광범위하게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금 협의를 요청하는 이유가 최근 제시된 한국의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이 우려를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USTR은 한국이 미국의 우려와 건의를 들었지만 한국 정부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이 문제를 바로잡지 않았고 한·미 FTA상의 의무를 따르지 않았다며 제도 변경을 요구했다.

퀄컴 1조원 과징금 때문?

USTR은 특정 조사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통상당국과 산업계에서는 퀄컴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공정위는 2009년 조건부 리베이트 제공 혐의 등으로 퀄컴에 273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2016년에는 표준필수특허 독점 및 불공정 라이선스 계약 강요 혐의 등으로 역대 최대 규모인 1조300억원의 과징금을 또다시 부과했다.

퀄컴은 두 번의 제재에 모두 불복해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차 제재는 대법원에서 공정위 승소 취지로 일부 파기환송됐다. 2차 제재는 소송이 진행 중이다.

미국상공회의소는 지난해 USTR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한국에 지식재산권의 상업화를 방해하는 규제·행정 장벽이 존재한다고 지적하며 그 사례로 공정위의 퀄컴 제재를 들었다. 미 상의는 “공정위 결정이 퀄컴이 한국 외 국가에서 취득한 특허권까지 규제하려 한다”며 “이는 국제 규범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한·미 FTA 협정에 따라 한 국가가 협의를 요청하면 다른 나라는 이에 응해야 한다. 하지만 협의를 요청한 나라의 요구를 반드시 수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한·미 FTA에선 경쟁 관련 사안은 분쟁해결 대상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공정위의 사건처리 절차가 한·미 FTA의 경쟁법 관련 규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미국 측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산업통상자원부와 긴밀하게 논의해 한목소리로 미국 정부와 협의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