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울보 예찬
적막이 흐른다. 관객들은 무대 옆 자막을 보고 있다. 몸을 살짝 일으켜 연주하는 악기들을 보다가 쉰 목으로 뽑아내는 강렬한 소리에 눈을 마주치기도 한다. 트로이 왕비 헤큐바의 절규로 막이 내리자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용수철처럼 튕겨 오르며 끊임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초조한 마음으로 숨죽이며 객석에 앉아 있던 나는 무심한 것 같았던 관객들의 눈물과 상상하지 못한 열렬한 반응에 목을 타고 넘어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난달 20여 일 동안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를 돌며 공연한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의 유럽 공연 현장 풍경이다. 세계 음악의 중심이란 자부심을 가진 유럽 관객들은 처음으로 만난 창극이란 새로운 장르에 콧대 높은 자존심을 버리고 젖은 눈으로 감동을 표했다.

“놀랍다” “멋진 작품” “두 번을 봐도 감동과 전율이 가시지 않는다” “한국에 이렇게 훌륭한 음악극이 있는지 몰랐다” “소리꾼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놀랍다” 등 찬사가 이어졌다. 프랑스, 미국, 캐나다, 칠레, 호주, 홍콩, 일본, 러시아 등에서 공연 초청 의사를 밝혔다.

판소리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에서 파생된 창극이야말로 세계적인 경쟁력과 비전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우리의 전통소리와 세계인이 다 아는 그리스 비극을 버무려 동시대성을 확보하고자 몸부림친 결과가 인정을 받으니 마치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것처럼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요즘 나는 TV를 보며 또 눈물의 대잔치를 벌인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부담을 안고 죽기 살기로 골을 넣어야 하는 국가대표들의 모습이 너무 절박해서 울고, 최강 독일을 이기고도 16강에서 밀려난 우리 젊은이들이 안쓰러워 울었다. 손흥민이 주저앉아 우는 울음에 눈물이 나고, 목쉰 해설자의 절규에 가까운 열정에 눈물이 나고, 온 국민이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함성에 눈물이 난다.

이렇게 울보가 되고 보니 정신과 의사 정혜신이 쓴 눈물에 대한 멋진 정의가 생각났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과 함께 그 고비를 넘는다. 눈물은 심리적 고비를 넘긴 표식이기도 하다. 눈물은 생의 결정적 힘을 만들어내고 삶과 사람에 대한 건강한 감각, 깨달음, 균형감각도 창조한다. 바로 눈물의 저력이다.” 그렇다. 내가 흘린 눈물은 나도 모르는 사이 심리적 고비를 넘은 표식이었던 것이다. 어려운 일을 극복하는 근원에는 ‘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고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흘린 6월의 눈물들은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창극과 축구의 미래를 향한 희망의 눈물이었다고 울보의 변을 대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