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서울남부지방법원의 한 법정. 성폭력을 당한 여성에 대해 허위 사실로 기사를 작성·유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성폭력 가해자 지인들의 명예훼손 선고 공판이 열렸다. 방청석을 가득 메운 한 무리의 여성들은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는 20분 동안 수첩에 메모하거나 피고인석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범죄 사실이 열거될 때 작게 한숨을 내쉬는 중년 여성도 보였다. 혐의별 유무죄 판단이 이어지자 곳곳에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연출됐다.

◆성범죄 재판 방청석의 ‘감시자들’

방청석의 감시자… '성범죄 재판 모니터링 운동' 확산
성범죄 법정에 들어가 재판을 모니터링하는 활동이 새로운 여성운동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재판 과정에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발생하지 않는지 ‘감시’하는 것을 넘어 개인 차원의 ‘연대’를 표하는 방법이다.

재판 모니터링 활동은 원래 시민단체 등 조직 단위로 이뤄져왔다. 한국여성민우회, 장애여성공감 등 여성단체나 성폭력상담소 관계자들이 성범죄 피해자의 재판에 동행하는 식이었다. 피해자가 와줄 것을 요청하거나 단체로 문제 재판부에 대한 제보가 들어오면 활동가들이 찾아간다.

최근에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점조직’ 형태가 두드러진다. 서로 모르는 익명의 시민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재판이 열리는 법원과 날짜를 공유해 ‘삼삼오오’ 모여 재판을 방청한다.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이들은 적게는 4~5명에서 많게는 50~70명까지 모였다가 재판이 끝나면 제대로 인사도 없이 헤어진다. 불특정 다수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주어진 행동을 한 뒤 곧바로 흩어지는 ‘플래시몹’과 비슷하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위드유(with you·당신과 함께) 운동’으로 진화해 정착해나가는 의미 있는 움직임이란 평가가 나온다. ‘가해자 폭로’에서 ‘피해자 연대’ 중심의 일상적 페미니즘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판사들도 긴장… 재판에 영향은 우려

방청석을 채운 여성들의 연령과 직업, 참여 동기는 제각각이다. 대학생부터 재판 방청을 위해 연차휴가를 쓰고 온 직장인까지 연령과 직업도 다양하다. 방청 경험이 있는 대학생 박모씨(25)는 “어릴 때 비슷한 범죄를 당한 기억에 피해자를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법정에 갔다”며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 보니 판사와 검사, 변호사도 확실히 단어 선택에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모니터링 대상은 성범죄 가해자가 기소된 형사재판, 피해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재판, 성범죄 가해자가 피해자를 ‘역고소’한 재판 등이다. 한국 법원은 재판 공개를 원칙으로 하기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재판 방청이 가능하다. 여성학자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미투 운동 등을 계기로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에서 직접 행동하고, 피해자에게 도움을 줄 용기를 내는 여성이 많아졌다”고 진단했다.

일각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저해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한 변호사는 “재판부가 사실관계를 확정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묻는 질문을 곡해하고 재판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면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