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땅에 묻힌 '고종의 밀사'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한글 첫 교과서 '사민필지' 써
'가운뎃점 찍기' 등 맞춤법 연구…'한글, 영어보다 우수' 논문 발표
8일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서 '한글, 헐버트를 만나다' 행사
제570돌 한글날(10월9일)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2시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서는 ‘한글, 헐버트를 만나다’라는 주제의 강연이 열린다. 체이스맨해튼은행 한국대표를 지낸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이 강연자로 나선다. 김 회장은 1991년 사업회를 조직해 헐버트 박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는 “헐버트 박사가 한글을 연구하고 알린 덕분에 지금의 한글이 있을 수 있었다”며 “한글 발전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공로를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헐버트 박사는 미국 동북부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다트머스대를 졸업했다. 1886년 조선 최초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에 외국어 교사로 오면서 조선 땅을 처음 밟았다. 조선에 도착한 그의 눈앞에는 처참한 현실이 펼쳐져 있었다. 조선인은 매우 가난했고 글은 물론 그 어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가 “조선의 근대화를 도와야 한다”며 발 벗고 나서기로 결심한 이유다.
헐버트 박사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한글을 접한 그는 충격을 받았다. 서툴지만 나흘 만에 어느 정도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한글이 조선을 문명국가로 끌어올릴 ‘비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여전히 한자를 쓰면서 한글을 무시했다.
헐버트 박사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1891년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제작했다. 세계 각국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내용의 천문·지리·사회서였다. 한글 사용을 호소하고 선비와 백성,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는 내용도 담았다. 이 책은 근대 교육사와 한글사에 크게 공헌했다.
육영공원이 축소 운영되자 헐버트 박사는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한글 사랑은 식지 않았다. 1892년 미국에서 한글과 관련한 최초의 논문(‘한글’)을 썼다. 1893년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들어온 그는 배재학당 교사로 일하며 국문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글 맞춤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던 한글에 띄어쓰기법과 가운뎃점 찍기를 도입한 게 연구 성과다.
고종의 정치·문화·외교 자문에도 응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하자 1907년 ‘헤이그 밀사’로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일제의 방해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49년 7월29일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았지만 8·15 광복절 행사를 10여일 앞둔 8월4일 별세했다. 헐버트 박사는 유언대로 서울 마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어 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