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이병과 일병
작가 이병주의 생전 회고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당시 학병의 뺨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세계대전을 감행한 일본군대에서 식민지 출신 인텔리의 고난이었다. 눈에 잡힌다. 하루의 생존 자체가 전쟁이었을 것이다. 대지주의 아들로 와세다대 유학생이었지만 부대에서는 제일 졸병이었다. 오장(伍長) 군조(軍曹)라는 하사관들의 두터운 손바닥에 먹물 학병들의 뺨은 수시로 불똥이 튀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듯 식민시대의 흔적도 많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병영문화는 군국주의 일본식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윤 일병 구타 사망사건은 폭력적 병영문화의 극단적인 사례였다. 일본제국의 군대문화가 미군의 제도와 결합했다는 분석도 있다. 초창기에는 일본군 경험자들이 많았다. 억압적 병영문화가 일본식이라면 계급과 편제, 작전은 대개 미국식이다. 훈련소에서 맨 처음 배우는 제식훈련부터 미군을 그대로 본떴다.

이병, 일병 하는 계급도 미군의 체제 그대로다. 미군의 갓 입대자가 private(이병), 다음 계급이 private first class(PFC·일병)다. 우리도 이병이 졸병이고, 일병이 더 상급이다. 많은 이들이 일병이 이병보다 더 높은 이런 명칭에 여전히 낯설어한다. ‘사적인’ ‘개인 소유의’라는 뜻인 private이 제일 졸병, 이병이 된 유래가 흥미롭다. 처음 군에 입대한 개개인이 군과 복무계약을 하면서 ‘민간계약서(private contract)’에 서명한 것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한국 군댓말로 치면 ‘사제(私製)물이 아직 덜 빠져서…’쯤 되는 기간병들의 놀림이 느껴진다. 일정 기간이 지나 민간 냄새가 가시고 군인 비슷하게 자세가 갖춰지면 일병으로 진급한다.

1954년 정착된 이병-일병-상병-병장의 사병 계급체계를 바꾸는 방안을 놓고 시끌벅적하다. 일병-상병-병장의 3단계로 하되 병장은 분대장에게만 부여한다는 게 육군의 방안이다. 예전에는 ‘고참졸병’ 문화가 어땠을까. 조선시대 예비군격인 속오군의 군적지 기록에 의하면 17세기 중반 충청도 지방의 최연소 예비병력은 10살짜리 말먹이 꼬마였다. 최고령으로는 69세의 취사병(火兵) 이름이 남아 있다. 1년에 두 번 동원됐다는 이런 부대의 지휘는 어땠을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사병들의 상하 관계는 오직 하나, 하루라도 먼저 입대했느냐에만 달린 것이 우리 군대다. 누구에게나 한치 착오없는 평등한 기준이지만, 부조리한 이 잣대를 어떡하나. 낡은 병영문화를 개선해보려는 군의 노력이 눈물겹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