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뒤 동인도회사를 매개로 주요 교역 품목이 됐습니다. 애초에 포르투갈인들이 인도 중부에서 생산되던 아편을 인도 고아를 통해 마카오로 운반해 팔았다고 합니다. 영국은 이 같은 아편의 생산과 수출 시스템을 체계화하고 확대했습니다. 중국의 차와 비단, 도자기를 원했지만 중국 시장을 뚫을 힘이 없었던 영국 상인들은 아편을 무기로 중국시장의 관문을 강제로 열어 재낀 것이지요.
아편무역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중국 사학자 존 킹 페어뱅크는 “근대에 가장 오래 지속된 국제범죄의 하나”라고 했지만 대다수 서양학자들은 은근슬쩍 이 문제를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경향도 강합니다. 반면 중국인들에게 아편무역은 서양의 상업 제국주의의 고전적 상징이자 중국을 황폐화시킨 서양의 탐욕과 폭력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실제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판 방식은 노골적이면서도 교묘했습니다. 인도를 식민 지배하던 영국은 인도에서 대량으로 아편을 재배한 뒤 검은색 축구공 만한 크기로 만들어 ‘약(藥)’이라고 쓰인 나무 상자에 넣어 중국으로 밀수했습니다. 동인도회사가 아편을 볼링공 모양으로 만들어서 대량으로 공급한 것입니다. 중국에서 아편은 약품으로만 유통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영국인들은 자신들은 단지 중국 연안에 정박 중인 중국 배들로 물건을 합법적으로 운반했을 뿐 물건을 받은 배들이 그 다음에는 무슨 짓을 하든지 통제범위 밖이라는 ‘현학적’인 면피놀음도 했습니다. “아편을 밀수하고 눈감아주는 것은 청나라 조정과 관료들”이라고 책임을 떠넘긴 것입니다.
중국 아편 수입량을 보면 1770년대 연평균 200상자였던 것이 1770년대엔 연평균 1000상자로 증가했습니다. 1800~1809년 3871상자이던 아편거래는 1811년 5000상자를 넘었습니다. 이는 또다시 1820~1829년에 1만311상자로 늘었고, 1830~1839년에는 2만2941상자로 급증했습니다. 1838년 한해만 4만 상자 이상이 쏟아져 들었습니다.
19세기 첫 30년 만에 거래량이 8배가 늘어난 아편은 당시 세계에서 단일 상품으로는 최고 교역물품이었고, 영국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던 은을 회수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중국의 은보유액은 1793년 7000만 냥에서 1820년 1000만 냥으로 급감했습니다. 1814~1850년 사이에 청나라 전체 화폐공급량의 11%인 1억5000만 멕시코탈러가 유출됐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대신 영국은 아편거래에서만 매년 15%의 높은 수익을 올렸고 1820년 이후에는 그 돈으로 중국차를 사들였습니다. 영국은 1910년 대서양 방면에서 1억2000만 파운드의 무역적자를 본 것의 상당부분을 중국(1300만 파운드)과 인도(6000만 파운드)에서 거둔 흑자로 메울 수 있었습니다. 아편수출액은 또 영국령 인도의 국민총생산 중 6분의1을 차지했습니다.
1870~1914년 기간 동안 인도는 대중국 교역에서 연평균 2000만 파운드의 무역흑자를 기록했습니다. 그중 1870년의 경우만 보더라도 아편무역으로 발생한 흑자는 최소 130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고수익 사업인 아편 거래에는 영국 뿐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총출동하다시피 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에스파냐, 스웨덴, 덴마크, 그리스가 아편무역에 발을 걸쳤습니다. 특히 미국 무역회사들의 활동이 활발해 아시아 아편시장의 3분의1은 미국이 차지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반면 송채(宋彩) 등 일부 거물급 매판들이 아편거래에 가담하긴 했지만 전체 중국인 매판의 수입에서 아편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큰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황이펑(黃逸峰)의 연구에 따르면 1842~1894년 청나라에서 활동하던 매판의 총수입은 5억3080만량이었는데 이중 아편수수료는 전체의 2%가 조금 넘는 1200만량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제국주의 세력의 적극적인 아편 판매로 중국은 최고위 엘리트층부터 사회 하층까지 아편의 피해자가 됐습니다. 1800년대 이전에는 3억 명 인구 중 아편중독자가 10만 명 수준으로 견딜 만 했지만 1818년 싸고도 효과가 강력한 파트나(patna) 아편이 개발되면서 1839년이 되면 1000만 명의 중독자가 사용할 양의 아편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19세기 초반에는 청나라 조정 대신들까지 어전회의 도중에 아편을 몰래 피우는 일도 벌어졌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심지어 황제인 도광제(道光帝)조차 세 아들을 아편중독으로 잃었다네요. 20세기 초가 되면 중국의 아편 중독자 수는 4000만 명 수준으로 높아졌습니다.
아편의 폐해가 중국에만 마수를 미쳤던 것은 아닙니다. 산업혁명기에 아편은 영국 제약회사에서도 없어선 안 되는 약재였습니다. 새로 개발된 특허약품에는 예외 없이 소량의 아편이 들어갈 정도로 널리 쓰였다고 합니다. 아편은 육체노동자들의 고통과 생활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환각제로 사용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퇴근 후에 유아들로부터 휴식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기들에게 아편이 들어간 진정시럽을 먹이는 일도 흔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유아사망률이 높아지자 19세기 영국 여성위생협회는 『유아대학살(Massacre of innocents)』이라는 이름의 소책자를 발간해 그 같은 관행에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das Opium des Volkes)”이라고 비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같은 사회 분위기도 한 몫 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중국 내에서 마약 거래를 한 혐의를 받던 한국인을 중국 당국이 전격 사형집행했습니다. 외국 국적을 지닌 사람을 가차없이 사형하는 모습을 보면서 중국의 안하무인격 일방통행에 대한 우려가 절로 생기기도 합니다. 한편으론 아편에 관한 악몽을 간직한 중국에서 마약사범은 일벌백계한다는 배경 설명도 접하게 됐네요. 자연스럽게 아편에 관한 역사가 떠올라 간략히 정리해 봤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