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모토 히사오 일본 헤이세이건설 사장, 사람을 남겨야 고수다…회사 세우자마자 1년간 인재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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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직원들에 '평가' 받는 사장…후계자도 투표로 뽑겠다
단 한번의 적자도 없다
목수의 아들·유도선수·영업사원 이력
하청없는 건설사 만들자 뛰어들어
인재경영이 최선이다
영업·경리·목수 1년간 함께 교육
목수수업 제대로 받는다 소문에
도쿄대·와세다대 인재들 줄서
상사는 직원 투표로 결정
인사관리도 직원 자율성이 먼저
실적좋고 존경받는 사람을 리더로
단 한번의 적자도 없다
목수의 아들·유도선수·영업사원 이력
하청없는 건설사 만들자 뛰어들어
인재경영이 최선이다
영업·경리·목수 1년간 함께 교육
목수수업 제대로 받는다 소문에
도쿄대·와세다대 인재들 줄서
상사는 직원 투표로 결정
인사관리도 직원 자율성이 먼저
실적좋고 존경받는 사람을 리더로
1990년대 후반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일본 건설업은 침체기를 맞았다. 매년 1만개가 넘는 업체가 사라졌다. 1999년 60만개였던 일본의 건설사는 2011년 48만개로 줄어들었다. 일자리도 줄어들었다. 일본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대 말 700만명에 달하던 건설업 취업자 수는 2011년 497만명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1989년 설립 이후 단 한 번의 적자 없이 꾸준한 성장을 한 기업이 있다. 바로 헤이세이건설이다.10명도 안 되는 직원으로 시작한 회사는 현재 500명이 넘는 중견회사로 발전했다. 매출액은 지난해 기준으로 140억엔(약 1420억원)에 달한다.이런 성공 뒤에는 헤이세이건설 창업자이자 사장인 아키모토 히사오가 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유도 선수로
아키모토사장은 1948년 10월15일 시즈오카현에서 목수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수가 된 아버지는 그에게 목수는 남자로 태어나 일생을 걸 만한 직업이라며 늘 목수가 되라고 말했다.아키모토 사장은아버지에게 ‘목수는 이 나라의 문화를 만드는 사람’, ‘다른 나라가 함부로 덤비지 못할 국력을 보여주기 위해 마을을 세우고 건물을 지은 사람’이라는 말을 늘 듣고 자랐다.
목수의 꿈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가 경영하던건설회사가 파산하면서 멀어졌다. 집안이 어려워져 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된 아키모토는 체육학교에 입학했다. 허약한 편이었지만 부지런히 운동했다. 전일본역도선수권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거기까지였다. 타고난 훌륭한 선수들이 많다는 깨달음을 얻고 운동을 그만둔 그는 23세에 다쿠쇼쿠대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뒤늦게 입학한 대학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결국 2학년이 되던 1970년 중퇴하고 중견 토지 개발업체에 취직했다. 토지 가격은 계속 상승할 것이라는 믿음이 일본 전역에 퍼져 있던 때였다. 대학 중퇴에 전문지식도 기술도 없던 아키모토에게 영업사원 외의 선택은 없었다. 하지만 토지사업은 도박과 같았다. 입사 3년 만에 회사는 월급을 제때 주지 못 할 만큼 어려워졌다. 그는 주택 건설업체로 자리를 옮기며 건설업과 인연을 맺었다.
호감을 사는 성격은 그곳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1년 만에 2000명이 넘는 영업사원 중 최고사원에 뽑혔고 7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종합건설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온 것이다. 그는 35세가 되던 1983년 종합건설회사 책임자로 이직했다. 그곳에서영업은 물론 직원 교육, 인사, 신입사원 채용 등을 모두 맡으며 6년간 회사 운영 전반을 배우게 됐다.
인재는 스스로 키운다
10년 넘게 건설업계에 있으면서 그는 건설회사가 직접 설계, 건설 등을 하지 않고 하도급을 주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필요할 때만 목수와 기술자를 고용했기 때문에 새로운 전문가는 성장하지 않았다.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놓은 목수라는 직업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마침내 아키모토 사장은 하도급이 주를 이루는 일본 건설시장에서 100% 내제화를 실현하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내제화란 영업, 설계, 디자인, 시공관리, 장인(기초공, 철근공, 목수 등), 사후관리까지 모두 외부하청을 주지 않고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1989년 헤이세이건설을 설립할 당시 일본 경제는 호황이었다. 신규 건설회사에서 인력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외주를 하지 않고 내제화하기로 했기 때문에 더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창업 후 1년 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을 모으는데 시간을 보냈다.아키모토사장은 스스로 인재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1990년 처음으로 대졸 공채를 시작했다. 2000년부터 전국적으로 대졸공채를 실시했다. 도쿄대, 교토대, 나고야대, 게이오대, 와세다대 등 일류 대학 출신들이 전국에서 몰려왔다. 목수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일본의 유일한 회사라는 점에서 대학생들의 선호가 높았다고 아키모토는 설명했다.
헤이세이건설에 입사한 신입사원은 1년간 공무부에 소속돼 다같이 교육을 받는다. 목수뿐 아니라 영업, 경리 지원자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사회인으로 기본매너와 함께 건축의 기초를 배운다. 아키모토 사장은 “건축학과를 나와도 대부분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한다”며 “이 기간에 비계공, 토공, 형틀목수의 업무는 물론 철근을 설계에 맞춰 배열하는 배근, 중장비 조작 등 기초적인 작업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돈을 남기면 하수, 업적을 남기면 중수, 사람을 남기면 고수’
아키모토의 경영철학은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이다. 사람을 키우기 위해 최고로 대우하고 자율성을 존중한다.
헤이세이건설의 임금은 대기업 수준으로 높은 편이다. 그는 인건비는 비용이 아닌 투자라고 말한다. 직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이 결국 그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력이 짧아도 그들이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준다. 회사는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줄 뿐이다. 헤이세이건설은 주로 임대아파트, 주문주택, 상업용 건물 등을 짓는다.임대아파트처럼 설계 등이 간단한 현장은 1~5년 경력의 목수들에게 맡긴다. 그는 “효율성을 높이면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생각은 잘못됐다”며 “매뉴얼화된 단순 작업 속에서 인간은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인사관리도 직원들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먼저 책임리더선발제도가 있다. 각 부문의 부장인 책임 리더를 소속 직원들이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사를 자신이 선발하는 셈이다. 실력 있고, 부하직원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선출되고, 임원회의에서 그를 임명한다.
매년 봄과 가을 개인 업무를 수치화하는 360도 업무평가제도도 실시한다. 관련 부서의 상사, 동료, 부하직원 등 10명이 넘는 사람이 한 명을 평가한다.아키모토본인도 직원들에게 평가를 받는다. 1년에 한 번씩 경영자의 경영방침, 행동, 계획 등에 대한 직원들의 의견을 듣는 ‘경영자 평가제도’를 실시한다. 그는 “앞으로 후계자도 직원들의 투표로 결정할 것”이라며 “아들이나 아내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
이런 상황에서도 1989년 설립 이후 단 한 번의 적자 없이 꾸준한 성장을 한 기업이 있다. 바로 헤이세이건설이다.10명도 안 되는 직원으로 시작한 회사는 현재 500명이 넘는 중견회사로 발전했다. 매출액은 지난해 기준으로 140억엔(약 1420억원)에 달한다.이런 성공 뒤에는 헤이세이건설 창업자이자 사장인 아키모토 히사오가 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유도 선수로
아키모토사장은 1948년 10월15일 시즈오카현에서 목수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수가 된 아버지는 그에게 목수는 남자로 태어나 일생을 걸 만한 직업이라며 늘 목수가 되라고 말했다.아키모토 사장은아버지에게 ‘목수는 이 나라의 문화를 만드는 사람’, ‘다른 나라가 함부로 덤비지 못할 국력을 보여주기 위해 마을을 세우고 건물을 지은 사람’이라는 말을 늘 듣고 자랐다.
목수의 꿈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가 경영하던건설회사가 파산하면서 멀어졌다. 집안이 어려워져 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된 아키모토는 체육학교에 입학했다. 허약한 편이었지만 부지런히 운동했다. 전일본역도선수권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거기까지였다. 타고난 훌륭한 선수들이 많다는 깨달음을 얻고 운동을 그만둔 그는 23세에 다쿠쇼쿠대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뒤늦게 입학한 대학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결국 2학년이 되던 1970년 중퇴하고 중견 토지 개발업체에 취직했다. 토지 가격은 계속 상승할 것이라는 믿음이 일본 전역에 퍼져 있던 때였다. 대학 중퇴에 전문지식도 기술도 없던 아키모토에게 영업사원 외의 선택은 없었다. 하지만 토지사업은 도박과 같았다. 입사 3년 만에 회사는 월급을 제때 주지 못 할 만큼 어려워졌다. 그는 주택 건설업체로 자리를 옮기며 건설업과 인연을 맺었다.
호감을 사는 성격은 그곳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1년 만에 2000명이 넘는 영업사원 중 최고사원에 뽑혔고 7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종합건설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온 것이다. 그는 35세가 되던 1983년 종합건설회사 책임자로 이직했다. 그곳에서영업은 물론 직원 교육, 인사, 신입사원 채용 등을 모두 맡으며 6년간 회사 운영 전반을 배우게 됐다.
인재는 스스로 키운다
10년 넘게 건설업계에 있으면서 그는 건설회사가 직접 설계, 건설 등을 하지 않고 하도급을 주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필요할 때만 목수와 기술자를 고용했기 때문에 새로운 전문가는 성장하지 않았다.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놓은 목수라는 직업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마침내 아키모토 사장은 하도급이 주를 이루는 일본 건설시장에서 100% 내제화를 실현하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내제화란 영업, 설계, 디자인, 시공관리, 장인(기초공, 철근공, 목수 등), 사후관리까지 모두 외부하청을 주지 않고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1989년 헤이세이건설을 설립할 당시 일본 경제는 호황이었다. 신규 건설회사에서 인력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외주를 하지 않고 내제화하기로 했기 때문에 더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창업 후 1년 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을 모으는데 시간을 보냈다.아키모토사장은 스스로 인재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1990년 처음으로 대졸 공채를 시작했다. 2000년부터 전국적으로 대졸공채를 실시했다. 도쿄대, 교토대, 나고야대, 게이오대, 와세다대 등 일류 대학 출신들이 전국에서 몰려왔다. 목수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일본의 유일한 회사라는 점에서 대학생들의 선호가 높았다고 아키모토는 설명했다.
헤이세이건설에 입사한 신입사원은 1년간 공무부에 소속돼 다같이 교육을 받는다. 목수뿐 아니라 영업, 경리 지원자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사회인으로 기본매너와 함께 건축의 기초를 배운다. 아키모토 사장은 “건축학과를 나와도 대부분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한다”며 “이 기간에 비계공, 토공, 형틀목수의 업무는 물론 철근을 설계에 맞춰 배열하는 배근, 중장비 조작 등 기초적인 작업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돈을 남기면 하수, 업적을 남기면 중수, 사람을 남기면 고수’
아키모토의 경영철학은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이다. 사람을 키우기 위해 최고로 대우하고 자율성을 존중한다.
헤이세이건설의 임금은 대기업 수준으로 높은 편이다. 그는 인건비는 비용이 아닌 투자라고 말한다. 직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이 결국 그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력이 짧아도 그들이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준다. 회사는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줄 뿐이다. 헤이세이건설은 주로 임대아파트, 주문주택, 상업용 건물 등을 짓는다.임대아파트처럼 설계 등이 간단한 현장은 1~5년 경력의 목수들에게 맡긴다. 그는 “효율성을 높이면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생각은 잘못됐다”며 “매뉴얼화된 단순 작업 속에서 인간은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인사관리도 직원들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먼저 책임리더선발제도가 있다. 각 부문의 부장인 책임 리더를 소속 직원들이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사를 자신이 선발하는 셈이다. 실력 있고, 부하직원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선출되고, 임원회의에서 그를 임명한다.
매년 봄과 가을 개인 업무를 수치화하는 360도 업무평가제도도 실시한다. 관련 부서의 상사, 동료, 부하직원 등 10명이 넘는 사람이 한 명을 평가한다.아키모토본인도 직원들에게 평가를 받는다. 1년에 한 번씩 경영자의 경영방침, 행동, 계획 등에 대한 직원들의 의견을 듣는 ‘경영자 평가제도’를 실시한다. 그는 “앞으로 후계자도 직원들의 투표로 결정할 것”이라며 “아들이나 아내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