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먼저 미래의 맥 짚어낸다면
'금융의 삼성전자' 볼 수 있을 것"
김화진 <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객원논설위원 hjkim7@snu.ac.kr >
한편 골드만삭스의 기업가치는 자신보다 정확히 100년 뒤인 1969년 설립된 삼성전자의 3분의 1이다. 브랜드가치는 삼성전자의 4분의 1이다. 금융의 삼성전자라는 말과 ‘한국판 골드만삭스’라는 말은 종종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착시현상은 골드만삭스의 영향력에 기인한다.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재무장관 세 사람, 대통령 비서실장 두 사람, 유럽중앙은행 총재, 잉글랜드은행 총재, 세계은행 총재를 배출했다. 골드만삭스는 기축통화국인 미국을 대표하는 투자은행이고 미국의 정치, 외교, 군사, 경제력의 산물이다.
한국의 경우는 굳이 목표를 설정한다면 골드만삭스보다는 스위스의 UBS가 모델이 될 수 있겠다. 인구가 한국의 4분의 1보다 적고 경상남북도를 합한 면적의 소국 스위스가 UBS와 크레디트스위스를 배출한 비결은 국제화다. 이 회사들은 해외에서 사업을 더 크게 벌이고 있고, 리스크관리 능력과 정부의 감독역량이 그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작년 상반기 국내 은행의 ‘초국적화지수’는 4.8%다. HSBC와 씨티는 각각 64.7%, 43.7%에 이른다.
국제화 외에도 한국판 UBS가 탄생하기 위한 조건은 많다. 그러나 금융회사가 아무리 애써도 경제상황이나 과도한 규제 때문에 기업공개(IPO)가 부진해서 상장회사 수가 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촘촘한 규제와 법률적 책임의 시대에 금융에서 스티브 잡스와 같은 혁신적인 영웅이 탄생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즘 유행하는 창조적 발상에 의한 탈출구는 없을까.
상장회사 지위가 인기가 없는 이유는 규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업공개를 하지 않고 상장회사가 아니어도 자금을 조달할 길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지난해에는 공모 같은 회사채 사모가 자금조달을 주도했다. 사모발행을 창안한 리먼브러더스는 사라졌지만 사모시장은 성장일로에 있다. 전자 증권거래의 증가와 국제적 증권거래가 사모시장을 지속적으로 발달시켜 오다가 미국은 2012년 4월 5일에 드디어 잡스법(Jumpstart Our Business Startups Act)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이 법은 파격적인 규제완화로 증권의 공모와 사모의 경계선을 흐리게 하고 크라우드펀딩을 규제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약 100년을 지속해 온 자본시장 규제체계의 기초를 송두리째 바꾸려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중소기업청이 한국판 잡스법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법은 중소기업의 자금조달 지원책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앞으로 IPO, 상장회사, 증권신고, 증권거래소 같은 개념들이 사라진다면 금융회사의 사업모델은 어떻게 바뀔까. 그리고 투자자들의 행동은 어떻게 변할까. 전통적인 환경에 적응해서 성공하려는 사업모델에 따르면 한국판 골드만삭스는 불가능하지만 그다지 머지않은 미래의 자본시장과 투자은행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그 대응작업을 해내고 미래의 맥을 짚는 데 성공한다면 잡스와 같은 혁신으로 지금은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한국판 UBS, 나아가 금융의 삼성전자가 머지않은 장래에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작업을 하고 있는가.
김화진 <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객원논설위원 hjkim7@snu.ac.kr >